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달(季達), 호는 백수(白水). 순창 출신. 아버지는 승의랑(承議郞) 양처기(楊處基)이며, 어머니는 강화최씨(江華崔氏)로 최휴지(崔休之)의 딸이다.
젊어서는 권집(權緝)에게 배웠고, 중년에는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55년(영조 31)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되고, 이어 익위사부수(翊衛司副率)로 옮겨졌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오로지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에만 전념해 「사서강설(四書講說)」을 남겼다.
천문학(天文學)에도 밝아 천체의 운행과 해 · 달 · 별 등의 천상(天象)을 도표로 만들어 우주관을 해설한 「혼천도설(渾天圖說)」을 지었다. 이기설(理氣說)에서는 스승 이재의 학설인 「이일기이설(理一氣二說)」을 바탕으로, 기(氣)의 본원은 하나이지만 동정(動靜)에 따라서 음양(陰陽) · 이기(二氣)가 교합되어 오행(五行) · 만물이 화생한다는 「일기이기설(一氣二氣說)」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람의 일신(一身)에는 혼백(魂魄) 또는 혈기가 있으며, 심(心)에는 이(理)와 지각(知覺)이 겸해 있다고 전제하고, 본연지기(本然之氣)와 혈기지기(血氣之氣)가 교합됨으로써 지각의 묘를 생한다는 「이기설(二氣說)」과 「지각설변(知覺說辨)」을 지었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는 낙론(洛論)을 지지하고, 호론(湖論)을 배척하였다. 만년에는 박성원(朴聖源) · 김원행(金元行) · 송명흠(宋明欽) 등 당시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1808년(순조 8) 사림들의 건의로 순창군 적성면 지북에 지계서원(芝溪書院)을 세워 양응수의 선조 양배(楊培)와 함께 향사하고 있다.
저서로는 『백수문집(白水文集)』 30권 17책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양응수의 서간집(書簡集)인 『백수서간선(白水書簡選)』이 전북대학교박물관에 의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