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 민여준(閔汝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기(閔機)이고,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숙종의 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이다. 대사헌 민기중(閔蓍重)과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동생이다.
1649년(효종 즉위년) 진사가 되고, 1651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대교·봉교·세자시강원설서·성균관전적을 거쳐 사헌부감찰·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내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상을 마친 뒤 사간원정언과 세자시강원사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1656년 병조정랑이 되었다.
그 뒤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 등을 지내면서 대신들과 시폐(時弊)를 놓고 다툰 끝에 조정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함경도 경성판관으로 나갔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7개 고을의 주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이듬해 중앙에 돌아와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1662년(현종 3) 잠시 여주로 물러나 앉기까지 홍문관부교리·교리, 사간원헌납·경상우도염찰사·이조정랑·성균관직강 등을 지냈다.
1663년 이후 이조정랑·홍문관교리·응교·사간원사간·사헌부집의·제용감정(濟用監正)·사도시정(司䆃寺正)·의정부사인 등을 두루 역임하다가, 1665년 전라도관찰사로 발탁되어 당상관에 올랐다. 그러나 몇 달만에 다시 중추부첨지사가 되어 내직으로 들고, 이어 장례원판결사·사간원대사간·승정원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내다가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과 다툰 끝에 벼슬을 버리고 광주에 은거하였다.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다시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리고 1671년부터 형조판서·대사헌·의정부우참찬·한성부판윤·호조판서 겸 총융사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벼슬을 내놓고 충주에 내려가 지내다가 끝내 흥해(興海)로 유배되었다.
그 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와 공조판서·호조판서 겸 선혜청당상·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서인 정권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3월 국구(國舅)가 되자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돈녕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다. 이듬해 금위영(禁衛營)의 창설을 주도하여 병권과 재정권을 모두 관장하였다. 이 후 점차 외척으로서 정권을 오로지 한다는 비난이 일어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다가 죽었다.
여주 섬락리에 안장되고, 효종의 묘정과 장흥의 연곡서원(淵谷書院), 벽동의 구봉서원(九峯書院)에 배향되었다. 경서에 밝았으며, 『민문정유집(閔文貞遺集)』 10권 10책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