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호는 ‘褡護’ · ‘搭護’ · ‘搭胡’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원(元)에서 들어온 것으로, 고려후기부터 조선후기까지 왕과 관리들의 상복(常服) 안에 입거나, 사대부의 겉옷 위에 덧입는 옷이었다.
형태는 옷깃은 곧은 깃이고 반소매가 팔꿈치에 이르며, 넓은 섶이 가슴을 덮어 겨드랑이 밑에서 여며지며 옷길이는 발목까지 오는 긴 길이로 옆트임이 있다.
우리 나라의 답호에 관한 최고(最古)의 기록은 고려시대 ≪노걸대 老乞大≫ · ≪박통사 朴通事≫에 대답호(大褡胡) · 답호(褡胡) · 답홀(褡忽)이 있으며, 더그레로 언해되어 있다.
≪세종실록≫에 26년 3월 명제(明帝)가 보내온 왕 상복 가운데 철릭(帖裏)과 함께 답호가 일습으로 들어 있고, ≪역어유해(譯語類解)≫에서는 답호 밑에 ‘더그레’라 주하고 있으며, ≪지봉유설≫에 조선시대 세종 때 허조(許稠)가 회색 답호를 상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더그레란 덧입는 옷의 총칭으로 호의(號衣) · 전복(戰服) · 답호가 포함된다.
답호의 원류는 징기스칸족의 역사서인 ≪집사(集史)≫(1300∼1304년 완성)의 미니어쳐에서 찾을 수 있는데, 징기스칸과 함께 몽고인들이 가장 많이 착용한 옷으로, 옆트임 사이로 안에 입은 옷과 홑옷 · 겹옷을 알 수 있고, 원대(元代)의 이유암(李裕庵) 묘 출토 향황색(香黃色) 답호가 있다.
고려시대의 답호 실물은 문수사(文殊寺)의 금동여래좌상(金銅如來坐像, 1346년 조성)의 답호와 해인사 금동비로자나불(金銅毘蘆遮那佛) 답호(1350년∼1362년 전후로 추정)가 있는데, 옆트임 안쪽에 주름잡은 별포가 달린 점이다.
조선시대 실물에 의하면 초기의 무는 단령, 직령의 무의 제도와 같다가 임진왜란 후에 전복무와 같아졌고, 섶이 좁아지고 소매 없는 답호도 생겼다. 이것은 청(淸)의 황제 · 황후 · 사대부가 쾌자(快子)와 같은 형태의 조괘(朝褂)를 착용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영조 재궁의대(梓宮衣襨)에 전복, 답호가 동시에 있는 것으로 보아 형태가 달랐음을 나타내며, 정조 재궁의대에는 답호(15着)와 쾌자(8着)의 기록이 있고, 순조 재궁의대는 쾌자(6着)만 있는 것으로 보아 순조 이후에 답호가 착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형태가 같아졌음을 고종 25년(1888) 직강(直講) 김영선(金榮善)이 답호와 전복은 그 제도가 달랐는데 답호령을 내리고 전복을 입으라고 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상소문으로 알 수 있다.
말기의 실물과 사진을 보면 현재의 돌복으로 입혀지고 있는 전복과 같았는데, 이것은 ≪정리의궤(整理儀軌)≫의 좁은 소매 쾌자와도 같다. 순조 이후 형태는 쾌자 하나로 집약되었고, 용어는 답호, 전복, 쾌자가 혼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