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高雲, 1479∼1530)은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다.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언룡(彦龍) · 종룡(從龍), 호는 하천(霞川)이다. 29세에 진사가 되었고 41세에 별시과인 병과에 급제하였다. 문과에 급제 후 벼슬에 나가지만, 그 이듬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화를 당해 낙향 후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졌다.
호남 사림(士林)으로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고경명(高敬命)의 할아버지이다. 출토 복식은 보공품(補空品)이 대부분이며, 당시 시신은 다소 육탈 건조되었을 뿐, 거의 본 모습을 간직하였다고 한다.
1986년 9월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에 있는 고운 묘를 이장하던 중 발견된 유물은 복식 21점과 만장(輓章) 16점, 기타 물품을 포함한 43점이다. 만장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여 지은 글인데, 무덤 주인의 신분과 사회적 성향, 특징을 보여준다.
복식 유물은 무명 홑단령 1점, 무명 솜 직령 1점, 철릭 6점, 솜 과두(裹肚) 1점, 답호 3점과 무명 홑바지 4점과 솜바지 1점, 소모자(小帽子) 2점, 버선 2점이 이불 2점과 함께 수습되었다.
직령과 철릭 등 포(袍)에서는 임진왜란 이전 복식에 나타나는 특징인 이중 깃과 고리에 걸어 부착한 고름, 크기가 작은 2쌍 고름, 대형 무 등이 나타난다. 철릭은 솜 철릭은 물론 겹 철릭, 홑 철릭 등으로 사계절 것이 모두 있었지만 누비옷은 출토되지 않았다. 과거에 직령으로 분류된 옷 중 포보다 짧고 저고리보다 긴 상의는 과두이며, 임진왜란 이전에 나타나는 복식이다.
홑바지는 모두 밑이 막히고 바지부리가 넓은 여자 속곳과 유사한 양식이나 임진왜란 전에는 남자가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솜바지는 복식사가들이 ‘세가닥 바지'라고 지칭하는 것으로, 밑이 막힌 바지와 밑이 트인 바지가 결합된 양식이다.
육합모(六合帽), 혹은 감투라고도 불렀던 소모자는 시신이 쓰고 있던 것이다. 모직 펠트(felt)인 전(氈)으로 제작한 것이며, 조사 과정에서 전으로 만든 소모자 안에 있던 공단 소모자가 발견되었다. 의복에 사용된 소재에 화려한 비단은 없고, 명주 · 무명 · 모시 등 토산의 직물이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