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氊)과 담(毯) 등도 전(氈)과 같은 것이다. 전은 모석(毛席), 즉 깔개·모자·어련(御輦)·가마 등의 덮개와 전(旃) 등에 사용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짐승의 털가죽을 복식자료로 사용하였으며, 삼국시대와 그 이후에는 모직물인 계(罽)를 많이 사용하였다.
신라에서는 오색 구유(氍毹)를 만들어서 당나라에 보내는 공예품의 깔개로 사용하였으며, 백제에서는 낙타와 양을 일본에 보낸 기록이 있어 일찍이 양모와 기타 동물의 모를 이용하였음이 나타난다. 일본의 쇼소원(正倉院)에는 화전(花氈)이 다수 수장되어 있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량이 신라와의 교역품이라고 추측된다.
고려시대에는 거란으로부터 양 1,000마리가 들어온 기록이 있다. 또 1101년(숙종 6)에는 여진의 전공(氊工)인 고사모(古舍毛) 등 6인이 귀화하자 토지와 집을 주고 호적에 올려주어 전을 제조하게 하였던 기록도 있어 고려시대의 전 제조의 상태가 나타난다.
『고려사절요』에는 922년(태조 5)에 거란으로부터 전을 가져온 기록도 있어 국내의 제조품 외에 수입품도 사용되었음이 나타난다. 『동국통감』에는 943년 청전필석(靑氈必席)의 기록이 있으며, 1231년(고종 18)의 기록에는 전려(氈廬)의 기록도 있다. 『고려사절요』에는 송상(宋商)이 가마를 금은금수로 장식하고, 오색 전으로 덮어 사치하고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전모(氈帽)의 기록도 있으며, 『연행록선집』에도 조선시대의 의복제도에 전립(氈笠)의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공장(京工匠)에 전장(氈匠)이 있어 전을 제조하였다. 『상방정례』에는 양모전·홍전·남전·흑전 등의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에 각색 전이 사용되었음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