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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잠견의 견층 섬유를 원료로 제직한 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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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가잠견의 견층 섬유를 원료로 제직한 직물.
내용

견섬유의 주성분은 피브로인(fibroin)이며, 이 피브로인은 세리신 성분(sericin 成分)의 교질물로 둘러싸여 있다.

세리신을 함유하고 있는 상태의 견사를 생견사(生絹絲)라고 하며, 생견사로 제직된 직물을 생견직물이라고 하는데, 촉감이 빳빳하고 광택이 좋지 못하다.

견의 세리신은 비눗물로 정련하면 용해, 제거되는데, 이렇게 처리된 견사를 연견사(練絹絲)라고 한다. 그리고 연견 처리된 직물은 연견직물이라고 하는데, 다른 섬유에서는 볼 수 없는 우아하고 고상한 광택이 나며 부드러워 고급 의료로서 사용된다.

세계 견직물사상 연대가 확실한 견직물 유품 출토지는 은허(殷墟)이다. 은나라 문화는 동이인(東夷人)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전설과, 은나라 삼현 가운데 한 사람이 동이인인 기자(箕子)이며, 기자가 기자조선 당시에 조선 백성에게 누에 치고 직조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한서 漢書≫의 기록 등을 종합해 보면, 우리 민족이 견직물 제직 발전에 기여한 바가 컸음을 알 수 있다.

(1) 고 대

고구려보다 건국 연대가 빨랐던 것으로 추정되며, 높은 수준의 문명을 보유했던 것으로 보이는 부여인들은 일찍이 외국에 갈 때 회(繪)·증(繒)·금(錦) 등 화려한 견직물을 입었다고 ≪삼국지≫ 위지 부여조에 기록되어 있어, 이들이 발달된 견직물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 後漢書≫ 예조(濊條)와 마한조에는 양잠을 행하고 면포를 제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韓條)에도 잠상(蠶桑)하며 면포(綿布)를 제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변진조(弁辰條)에도 잠상하며 겸포(縑布)를 제직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한서≫ 지리지에는 낙랑 지역의 지명으로 잠대(蠶臺)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지명을 통해 이 곳이 양잠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록들을 통하여 일찍부터 우리 나라 거의 전지역에서 양잠과 견직물의 제직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2) 삼국시대

≪삼국지≫ 위지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인의 의료가 포백(布帛)이며, 공회복(公會服)이 금(錦)·수(繡)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 舊唐書≫는 고구려에서 양잠하는 것이 중국과 같으며, 왕의 의료와 관의 재료로 오채(五綵)·백라관(百羅冠)을 사용한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귀자(貴者)는 청라(靑羅)·비라(緋羅)의 관을 쓴다고 하였다. ≪수서 隋書≫에도 고구려의 귀자가 자라(紫羅)의 관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책부원구 冊府元龜≫에는 771년 사치를 금하는 조(詔) 중에 허용 직물로서 고려백금이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의 직사부(織司部)에서도 백지의 고려금을 제직하였다고 한다.

고려백금은 고구려의 금으로서, 백색을 숭상한 우리 민족이 색이 있는 금보다 백색 금을 더 선호하여 제직한 특산품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 귀자는 청라·비라·자라의 관을 썼으나 왕은 백라관을 쓴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백색을 귀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예맥계의 부족을 통합하여 나라를 세우고 수세기에 걸친 중국과의 투쟁에서 한걸음씩 전진하여 북으로는 고조선의 땅을 회복하고, 남으로는 평양 방면으로 세력을 넓힘으로써 양잠의 적지를 많이 확보하여 일찍이 견직물 제직이 발전한 것이다.

백제에서도 금과 각종 견직물이 제직된 사실이 ≪구당서≫ 백제전에 나타난다. 이 기록에 의하면, 백제왕은 청금고(靑錦袴)·자포(紫袍)·오라관(烏羅冠) 차림을 하였고, 관인(官人)은 비의(緋衣) 차림을 하였다고 한다.

≪문헌통고 文獻通考≫ 백제조에는 백제에서 부세(賦稅)를 포(布)·견(絹)·마(麻)·미(米)로 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백제에서 견이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위서≫ 백제전 연흥연간(471∼475)조에는 백제에서 보낸 조(詔)의 물목 중에 금이 포함되어 있어, 백제가 상당히 이른 시기에 중국에 금을 보낸 사실이 나타난다.

백제는 발달한 해상교통을 바탕으로 일찍이 주변 국가들과 통상함으로써 문명의 발전이 빨랐으며, 국제적으로 문화를 발전시켰음이 ≪수서≫ 백제전에 나타나 있다. 이에 따라 견직물 제직 문화도 적극적·진보적으로 유도되어 고도로 발전시킨 듯하다.

신라는 초기에 삼국 중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백제·고구려가 멸망한 뒤로부터는 대대적으로 해상에 진출하여 동지나해상의 패권을 잡고 요하 유역에서 강남에 이르는 대륙 연안의 요항(要港)에 신라인의 거류지를 구축하는가하면, 육로로는 만주에까지 교역 범위를 확대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 위에 문화를 발전시켜 완전 통일국가를 이루었으며, 상당히 높은 수준의 문화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처럼 정치적·문화적 수준이 고도화됨에 따라 견직물 제직 문화도 고도로 발전했음이 ≪삼국사기≫ 복식금제의 기록에 나타난다. 금제에 기록되어 있는 견직물로는 금(錦)·나(羅)·수(繡)·능(綾)·주(紬)·시(絁)·견(絹) 등이 있으며, 기타에서 백(帛)·초(綃)·사(紗)·채(綵) 및 잡지(雜志)의 채단(綵段) 등의 종류도 나타나고 있다.

직관(織官)에는 능색전(綾色典)·금전(錦典)·기전(綺典)·조하방(朝霞房) 등의 공장(工匠)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어, 능·금·기 등이 별개 공장에서 제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하방은 특산 견직물인 조하주·어아주 등을 제직한 곳으로서, 이 특산 견직물은 중국이나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이러한 우리의 발달된 직제기술은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일본서기≫에는 오진왕(應神王)·유랴쿠왕(雄略王) 때에 우리 나라에서 직인들(穴織·吳織·漢織)이 건너가 일본 직물 제직의 기초를 마련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금직인(錦部·安那)·능직인(綾人)이 우리 나라로부터 건너가 금·능의 제직이 시작된 사실도 많은 문헌 기록에 전하여지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동북 아시아 지역에서 발생된 견직물 문화는 중국 지역을 기점으로 하여 서역(西域)으로, 우리 나라를 기점으로 동역(東域)으로 전파되어 세계 견직물 문화를 기흥(起興)시켰다고 할 수 있다.

(3) 고려시대

삼국시대의 견직물 문화는 고려시대로 이어져, 견·백·주·사·능·나·수·기·채·곡·초·증·회·소·호(縞)·환(紈)·금·난(襴) 등의 견직물 이름이 ≪고려사≫ 등 많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단(段)의 사용 기록이 늘어났다. 색채·문양 등이 삼국시대보다 세밀하게 표현되어 종류가 다양하다. 금장(錦匠)·나장·견장·잡직서(雜織署) 및 능장과 농가, 사원(寺院)에서의 제직이 나타나고 있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견직물은 주·사·나·능·초·견·회·금·단·향직(鄕織)·광적(廣的) 등이며, 색과 문양에 따른 직물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견직물은 능라장·향직원·통직(通織) 등에서 제직되었다. 향직은 문직견으로서, 단을 향토적으로 제직한 직물이다. 곧, 조선시대의 특산 문직견이다.

궁중의 직조발기에는 용문(龍紋)·전자(篆字)·수복자(壽福字)·수천만세(壽千萬歲) 등의 직금(織金)과 여러 가지 색과 갖가지 문양의 대란(大襴)·스란[膝襴]을 다량 제직한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가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운 시대였으며 인구가 늘어 견의 생산과 수요가 많지 않았을 텐데도 제직 직물의 종류는 오히려 다양해졌음이 나타난다.

특히, 오늘날에도 한복 재료로 사용되는 명주·노방주·갑사·은조사·숙고사·국사·관사·진주사·항라·모본단·유동·양단 등이 조선시대 문헌에도 나타나고 있어, 그 제직의 역사가 대단히 오랜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현대에 걸쳐 제직, 사용된 대표적 견직물은 견·백·증·겸·소·환·호·제·시·주·초·사·나·능·곡·금·단·난·회 등이다. 견·백·증은 견의 총칭이고, 겸은 병사직(幷絲織)이며, 소·환은 흰 견직물이다. 호는 세증이며, 제는 후증(厚繒)이다. 시는 조사직견(祖絲識絹)이다.

주는 평직의 견직물로서 중국에서는 두껍고 싼 것으로 제직되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얇고 정교한 평직으로 제직하여 의료로서 가장 많이 사용하였으며, 중국·일본 지역에서도 우리 나라의 주가 선호되어 삼국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에 걸쳐 많은 양이 교역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문주(紋紬)도 많이 제직되었으며, 주요 평직과 문직의 종류가 아주 많다. 섬세함과 단조로움이 우리 민족이 선호한 특징인 것이다.

초는 생사견이다. 사는 사직견이며, 나는 여직견이다. 능은 능직물인데, 고대에는 변화능직이 많았다. 곡은 크레이프 견직이다. 금은 평직과 능직의 문직으로서 다채로운 것이 원칙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단색으로도 제직하였다. 단은 주자문직이다.

난은 금·은사를 직입한 문직물이다. 회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금은 조선시대에 각색 문자와 문양의 직금으로 제직하여 궁(宮)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난은 고려시대에 동란이 제직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한복 재료 직물로서 제직되고 있는 양단·유동은 춘추 또는 겨울용 의료인데, 이불감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주는 수직명주의 제직과 사용이 최소한으로 줄어든 상태이나, 각색의 색주(色紬)와 문주(紋紬)가 수직 또는 기계직으로 제직되어 다량 사용되고 있다. 국사·숙고사·진주사는 늦은 봄과 이른 가을철 의료로서 많이 사용된다.

항라는 이른 여름철에 많이 사용되며, 갑사·생고사·노방·은조사는 여름철에 많이 사용된다. 항라·노방·은조사는 안팎으로 옷감을 겹쳐 옷을 지음으로써 안감과 겉감이 올올이 겹쳐 나타나는 변화무쌍한 아롱문을 즐기는 옷감이다.

평범한 옷감으로 무궁한 변화를 나타내는 신비함을 지니고 있다. 근래에는 수직으로서 절직(節織)이 주(紬)와 같이 제직되어 여인의 치마·저고리와 남자의 두루마기감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견직물은 드라이클리닝을 하고 있으나 전통적으로는 곱게 다루며, 물세탁하여 말린 뒤, 해조 또는 전분으로 풀을 먹여 곱게 만지고 밟아서 다듬이질하여 다려서 사용하였는데, 그 질감이 깨끗하고 청초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궁중발기(宮中發記)』
『국혼정례(國婚定例)』
『상방정례(尙方定例)』
「직물의 종류에 관한 연구」(민길자, 『국민대학교교육논총』 6,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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