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 단령 ( )

의생활
의복
문화재
대한제국기, 개화사상가 유길준이 착용하였던 개량식 소례복 단령.
의복
재질
명주|모시
제작 시기
1909년
소장처
고려대학교 박물관
국가등록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가등록문화재(2014년 10월 29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로 145 (안암동5가, 고려대학교안암캠퍼스(고려대학교박물관))
내용 요약

유길준 단령은 대한제국기, 개화사상가 유길준이 착용하였던 개량식 소례복 단령이다. 단령 1은 겉감은 검은색 명주, 안감은 푸른색 명주로 만든 겹단령이며, 단령 2는 검은색으로 물들인 모시로 만든 홑단령이다. 두루마기 형태에 단령 깃을 부착하고, 고름 대신 단추를 부착한 형태로 서양식 요소를 도입하여 단순하게 만들었다. 1909년에 유길준이 이 단령으로 보여지는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 전해진다.

정의
대한제국기, 개화사상가 유길준이 착용하였던 개량식 소례복 단령.
연원

구당(矩堂)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은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서유견문(西遊見聞)』의 저자이면서 내부대신의 관직으로 갑오경장을 이끌며, 양복의 편리함을 내세우며 국가적 보급화에도 앞장섰다.

유길준의 단령 2점은 겹단령과 홑단령으로 구성되었으며, 소매가 좁은 소례복 제도에 고름 대신 단추를 부착하는 서양식 요소를 도입하여 간단하게 만들었다. 그 형태가 1908년 국민예복의정회(國民禮服擬定會)에서 민간이 주도한 국민의 통상예복을 공모하여 채택된 디자인을 토대로 만든 것으로 보여지며, 제작 시기는 '1909년 대한협회 2주년 기념사진'에서 단령 착장 모습으로 보아 1909년 정도로 추정된다.

형태 및 용도

단령 2점은 옷감과 색상만 다를 뿐, 주1 단령을 개량한 형태로 구성법이 같다. 단령 1은 두루마기 형태에 둥근 을 부착하였으며, 고름 대신에 단추로 여밈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길이 120.7㎝, 품 46㎝, 주2 73.8㎝, 주3 22.5㎝의 크기이다.

겉감은 검은색 명주이고, 안감은 짙은 청색 견직물로 제작된 겹단령이다. 깃 모양은 둥근 깃 형태이며 안에 직령 깃은 없는 상태이다. 동근 겉깃은 쇄골 부분에서 끝이 나며, 겉깃 끝에는 매듭단추 1개를 달고, 쇄골 쪽에 단추 구멍을 달아 여밈하였다.

겉섶의 상부에 고름 대신 여밀 수 있는 사각 형태의 단을 내어 단추 구멍 2개를 만들고, 오른쪽 가슴 부위에 서양식 검은 단추 2개를 달아서 가슴 부분에서 여며지도록 하였다. 겉섶은 중심선을 기준하여 사선 형태로 좁게 달려 있는데, 상부는 들여 달리고 하부는 중심선에 위치한다.

옆선 좌우에는 두루마기처럼 삼각형 가 좁게 달려 있으며, 양 옆으로 손을 넣는 트임이 있다. 전체적으로 손바느질로 제작되었으며, 보관 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다.

단령 2는 두루마기 형태에 단령 깃을 부착하고 동정이 달렸으며, 고름 대신에 단추로 여밈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길이 119㎝, 품 48㎝, 화장 73㎝의 크기이며, 검은색 모시로 만든 홑단령이다.

깃 모양은 둥근 깃 형태로 만들고 겉깃 부분을 쇄골 부위까지 오도록 하고 끝에는 매듭 단추를 달았다. 둥근 깃 안쪽에는 직령깃 형태의 동정을 달았다. 주4이 없기 때문에 흰색 명주에 종이심을 댄 직령 깃만 만들어 주5로 둥근 깃 안쪽에 고정하였다.

겉섶은 중심선 기준으로 사선 형태로 달렸으며, 상부의 가슴 부위에 서양식 단추 2개를 달아 여밈하였다. 옆선 좌우에는 두루마기처럼 삼각형 무가 좁게 달려 있으며, 양 옆으로 손을 넣는 트임이 있다. 홑옷이어서 어깨 주6와 겨드랑 바대를 부착하였으며 솔기는 주7로 하였고 전체적으로 바느질이 매우 정교하다.

'1909년 대한협회 2주년 기념사진'에서 단령 착장 모습이 확인되는데, 이들 단령을 착용할 때에는 허리띠는 착용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단령은 조선시대 관리의 대표적인 관복으로, 둥근 깃을 단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관리의 상복으로 흑단령, 시복으로 홍단령이 규정되어 계속되다가 1884년(고종 21) 갑신의제개혁(甲申衣制改革) 의복 간소화 개혁 때 상복과 시복을 흑단령 하나로 통일하였다.

단령은 시기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변화되었는데, 특히 무와 소매의 변화가 크다. 조선 전기의 좁은 소매와 옆으로 뻗어나간 무 형태가 후기로 가면서 넓은 소매와 뒤로 접힌 무로 변모하였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관복 간소화가 실시되어 1894년 갑오의제개혁(甲午衣制改革)에서 좁은 소매를 입도록 하였고, 1895년 을미의제개혁(乙未衣制改革) 때는 흑반령착수포(黑盤嶺窄袍袖), 즉 소매가 좁은 단령을 소례복이라 불렀다.

1898년 이후 대례복도 착수 형태의 흑단령으로 규정되면서 소매가 좁은 단령 형태에 흉배를 달면 대례복으로, 흉배를 달지 않으면 소례복으로 착용하였다. 이때 소례복 단령의 형태는 둥근 깃에 고름이 달리고, 소매가 좁으며, 옆선에 삼각 무가 달리고 두루마기와 같이 옆이 막혀 있는 형태이다. 이후 1900년에 내려진 문관복 규칙에서 소례복을 서구의 연미복으로 바꾸도록 하여 착수의 흑단령 규정을 대신하였다.

1908년 국민예복의정회에서 민간이 주도한 국민의 통상예복[소례복]을 공모하였다. 서양식 요소를 도입하여 소매가 좁고 고름 대신 단추를 부착한 디자인이 채택되었는데, 유길준의 단령 2점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구당이 이러한 형태의 단령을 착용하고 1909년에 촬영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진이 남아 있으며, 숙명여자대학교 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연세대학교 박물관, 경운박물관에 유길준 단령 2점과 유사한 복식이 소장되어 전해진다.

1976년에 유길준의 손자 유병덕이 고려대학교에 기증한 유길준 관련 유물 일괄에 포함되어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014년 10월 29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의의 및 평가

개화사상가 유길준이 착용하였던 개량식 소례복 단령이란 점에서 의의가 높다. 기존의 착수 단령 유물과 달리 1908년 국민예복의정회 공모로 채택된 소례복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으며, 이 유물로 보이는 의복을 착용한 1909년 사진까지 남아 있어 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전통 복식과 서양식을 결합한 절충적 요소가 보여 복식사적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2014 등록문화재 등록조사보고서』(문화재청, 2015)
『유길준과 개화의 꿈』(국립중앙박물관 · 조선일보사, 1994)
『복식류명품도록』(고려대학교 박물관, 1990)

논문

이경미, 「개항기 전통식 소례복 연구」(『복식』 64-4, 한국복식학회, 2014)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주석
주1

좁은 소매.

주2

저고리의 깃고대 중심에서 소매 끝까지의 길이.    우리말샘

주3

어깨선에서 겨드랑이까지의 폭이나 넓이.    우리말샘

주4

옷 안에 받치는 감.    우리말샘

주5

바느질을 할 때 천을 맞대어 듬성듬성하게 대강 호는 일.    우리말샘

주6

홑적삼이나 고의 따위의 잘 해지는 곳에 안으로 덧대는 헝겊 조각.    우리말샘

주7

한쪽 시접을 다른 한쪽보다 더 넓게 두고 박은 다음, 뒤집어 넓은 시접으로 좁은 시접을 싸서 납작하게 눌러 박은 솔기. 흔히 운동복이나 작업복 따위의 바느질에 쓰인다.    우리말샘

집필자
이명은(우리옷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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