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의제개혁은 1895년(고종 32)에 내려진 전통식 의복의 간소화와 서구식 복식 채용에 관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전통식 의복의 간소화, 서구식 제복의 제정, 단발 및 서구식 복식의 허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문관은 전통식 복제를 따르되 종류와 형태를 간소화하고, 무관은 군인, 경관으로 나눠 각각 형태가 다른 서구식 복제를 규정한다. 또 문관의 전통식 복제가 조복과 제복 외에 대례복, 소례복, 통상예복으로 분류되며, 이때 처음 ‘소례복’ 용어가 등장한다는 특징이 있다. 연말에는 단발령과 함께 서구식 복식의 채용이 허용되었다.
조선 후기 관원의 관복(官服)과 일반인의 예복(禮服)은 품과 소매가 넓고 기다란 옷을 여러 점 겹쳐 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서구 문물이 유입되면서 전통식 의복 간소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884년(고종 21) 갑신의제개혁(甲申衣制改革)을 통해 간소화하고자 했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에 의복 간소화의 시행을 목적으로 1894년(고종 31) 갑오의제개혁(甲午衣制改革)과 1895년(고종 32) 을미의제개혁(乙未衣制改革)이 연속으로 진행되었다. 또 전통식 무관이 군인과 경관(警官)으로 분리되어 이들의 복식을 각각 제정할 필요가 있었고, 서구식 제복을 전면적으로 채택함으로써 행동의 민첩성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일반 사회에서도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단발(斷髮) 및 서구식 복식을 채용할 필요가 있었다. 을미의제개혁은 이러한, 전통식 의복의 간소화와 서구식 복식의 채용이라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1895년 을미년의 의제개혁(衣制改革)은 문관복(文官服), 무관복(武官服), 일반에서의 단발과 서구식 복식 채용으로 구분된다. 문관복은 3월 29일 반포된 칙령 제67호와 8월 10일 반포된 「조신 이하 복장식(朝臣以下服章式)」에서 규정되었다. 무관복은 4월 9일 칙령 제78호 「육군복장규칙(陸軍服裝規則)」과 4월 19일 칙령 제81호 「경무사 이하 복제(警務使以下服制)」가 반포되어 군복(軍服)과 경관복(警官服)이 구분되었고, 형태도 서구식으로 바뀌었다. 11월 15일에는 고종이 단발을 단행하면서 단발령(斷髮令)의 조서(詔書)를 내리고, 내부(內府) 고시(告示)로 일반인들이 외국 복식을 채용해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문관복은 3월 29일에 “공사(公私) 예복에서 답호(褡護)를 없애고 궐에 들어올 때만 모(帽), 화(靴), 실띠(絲帶)를 착용하고, 두루마기(周衣)는 관리와 백성들이 똑같이 검은색 종류로 하라.”라고 하였다. 공사 예복에서 답호를 없앤다는 말은 1894년 12월에 반포된 칙령 제17호에서 ‘궁에 들 때의 통상예복(通常禮服)’으로 규정한 사모(紗帽), 두루마기, 답호, 화에서 답호를 제외시킨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되면 사모, 검은색 두루마기, 실띠, 화가 관원이 궐에 들어갈 때의 차림이 된다. 또 1894년에 두루마기 위에 답호를 입는 것으로 일반인과 차별화했던 관원의 옷이 이제 일반인과 같아지게 되고, 검은색 두루마기가 일반화된다. 그러나 관원이 두루마기 위에 답호를 입는 것은 8월 10일 반포된 「조신이하복장식」에서 부활하게 되었다.
「조신이하복장식」은 총 4항으로 이루어졌다. 문관의 복식을 조복(朝服), 제복(祭服), 대례복, 소례복(小禮服), 통상복색(通常服色)의 5종류로 구분한다. 제1항은 관원의 조복과 제복에 관한 규정으로, 기존의 양관복(梁冠服) 제도를 유지한다. 제2항은 대례복에 관한 규정으로, 사모, 흑단령(黑團領), 품대(品帶), 화(靴)의 차림이다. 당시의 복식 제도와 1897년(광무 1) 이후의 대한제국시대의 제도를 고려하면, 대례복용 흑단령은 넓은 소매에 흉배(胸背)를 부착한 형태이다. 제3항은 소례복에 관한 규정으로, 사모, 흑색의 소매가 좁은 반령포(盤領袍), 속대(束帶), 화의 차림이다. 유물과 사진을 근거로 보면, 소례복용 흑색 반령포에는 흉배가 없다. 제4항은 통상복색에 관한 규정으로, 두루마기, 답호, 실띠 차림이다. 1894년 갑오의제개혁을 참고하면, 이 차림에 사모를 쓴다. 통상복색은 “내관(內官)과 외관(外官)이 업무에 들 때 구애 없이 입으며, 진현(進見)할 때는 입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1894년 7월 12일에 제정된 제도를 근거로 보면 ‘내관’은 궐 안의 관서(궐내각사)에 근무하는 관원이고, ‘외관’은 궐 밖의 관서(궐외각사)에 근무하는 관원이다. 즉, 궐 안팎의 관서에 근무하는 관원이 모두 사모, 두루마기, 답호, 실띠를 입고 근무하게 한 것이다.
무관복 중 군인의 서구식 제복은 4월 9일 칙령 제78호 「육군복장규칙」에서 처음 규정되었다. 규칙의 내용은 제1장 총칙, 제2장 패착통칙(佩着通則), 제3장 정장(正裝), 제4장 군장(軍裝), 제5장 예장(禮裝)과 부칙(附則)으로 되어 있다. 당시 육군의 복장은 정장, 군장, 예장, 상장(常裝)의 4종류로 나뉘었다.
무관복 중 경찰의 서구식 제복은 4월 19일 「경무사 이하 복제」에서 처음 규정되었다. 경무청(警務廳)에 속한 경무사(警務使), 총무국장인 경무관(警務官), 일반 경무관의 상모(常帽), 상의(常衣), 하의(夏衣) 등에 대해 규정하였다.
근대에 서구 문물의 유입과 함께 진행된 전통식 의복의 간소화는 1884년(고종 21)의 갑신의제개혁, 1894년의 갑오의제개혁, 1895년의 을미의제개혁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갑오년과 을미년의 의제 개혁은 하나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고, 이때의 제도는 실제 시행으로 이어진다는 의미가 있다. 또 을미년에 처음 규정되는 군인과 경찰의 서구식 제복, 일반에 허용된 단발과 서구식 복식은 이후 우리의 옷차림을 변혁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을미의제개혁에서 전통식으로 유지된 문관의 복식은 1900년 4월에 칙령으로 「문관대례복규칙」과 「문관대례복제식」이 반포되면서 처음으로 서구식으로 바뀌었다. 군인과 경관의 서구식 제복은 이후 여러 차례 제도 변화를 보인다.
갑신의제개혁에서 실패했던 전통식 의복의 간소화는 갑오의제개혁과 을미의제개혁을 통해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제도로 정비되었고, 실제로도 시행되어 실효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복식 구성면에서는 관원의 근무복으로 사모를 쓰고 단령을 입던 방식에서 벗어나, 사모에 두루마기와 답호를 입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 차림은 갑오년에 처음 나타나 을미년에도 계속 규정된 것이었다. 신라시대에 당(唐)에서 받아들여 착용하기 시작한 관복으로서의 단령이 이때부터 유구한 역사를 뒤로 하고 소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또 ‘소례복’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허리띠로 ‘속대’가 처음 등장한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을미의제개혁의 또 하나의 의의는 군복과 경관복의 서구식 제복 채용, 단발 시행, 일반의 서구식 복식 허용을 통해 서구식 복식이 일반화되는 단초를 열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