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관대례복제식 ()

의생활
제도
1900년(광무 4) 4월 17일, 칙령 제15호로 규정된 문관의 서구식 대례복(大禮服) 형태에 관한 최초의 제도.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1900년(광무 4) 4월 17일
공포 시기
1900년(광무 4) 4월 19일
시행 시기
1900년(광무 4) 4월 19일
폐지 시기
1910년 8월 29일
시행처
대한제국
주관 부서
의정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문관대례복제식은 1900년(광무 4) 4월 17일 칙령 제15호로 규정된 문관의 서구식 대례복(大禮服) 형태에 관한 최초의 제도이다. 대례복을 구성하는 여러 복식의 형태, 소재, 무늬 등에 관해 상세히 규정하였다. 1904년(광무 8), 1905년(광무 9)에 일부 개정되었고, 1906년(광무 10)에 전면 개정된 형태는 일제가 대한제국 병탄 준비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이 제도는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더 이상 시행되지 않았다.

정의
1900년(광무 4) 4월 17일, 칙령 제15호로 규정된 문관의 서구식 대례복(大禮服) 형태에 관한 최초의 제도.
제정 목적

문관대례복제식을 1900년(광무 4)에 대한제국에서 최초로 제정할 당시의 목적은 행정 사무를 보는 문관(文官)의 대례복(大禮服) 형태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문관의 복장을 처음으로 전통식에서 서구식으로 바꾸면서 당시로서는 생소한 구성품과 형태가 등장하므로 그에 대해 상세히 규정한 것이다. 1906년(광무 10)에 전면 개정할 때는 일제의 입김에 의해, 일본 문관의 대례복보다 등급이 낮은 형태로 제정되었다.

내용

칙령 제15호 「문관대례복제식」은 칙령 제14호 「문관복장규칙(文官服裝規則)」과 함께 1900년 4월 17일에 제정되어 4월 19일 『관보(官報)』에 게재되었다. 또 「제식」과 함께 공포되었어야 할 「문관대례복도식(文官大禮服圖式)」은 1901년(광무 5) 9월 3일에 가서 『관보』에 게재되었다. 근대에 서구식 복식을 규정할 때는 「~규칙」, 「~제식[製式. 혹은 ‘복제(服製, 服制)’, ‘복식(服式)’, ‘규제(規制)’라 함]」, 「~도식」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반포한다. 「규칙」에서는 복식의 종류, 착용 신분, 착용 상황, 복식 종류별 구성 요소 등을 규정한다. 「제식」에서는 「규칙」에 있는 각 복식의 세부 형태, 크기, 장식 등을 문자로 규정하고, 「도식」은 「제식」에서 규정된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문관의 서구식 복장은 칙령 제14호 「문관복장규칙」에서 대례복, 소례복(小禮服), 상복(常服)의 세 종류로 규정하였고, 칙령 제15호 「제식」에서 그중 대례복의 구성품별 형태를 규정하였으며, 이 형태를 「도식」으로 그려서 공포한 것이다. 이 도식의 원본은 ‘『관복장도안(官服章圖案)』(No. 4372. 복사본 No. 4374도 있음)’이라는 자료명으로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문관복장규칙」에 의하면, 대례복은 칙임관(勅任官)주임관(奏任官)만 입을 수 있다. 황제에 대한 문안, 황제의 거둥[動駕], 황태자의 거둥[動輿], 공적으로 황제를 알현할 때, 궁중 연회에 참가할 때 등에 착용한다. 대례모(大禮帽), 대례의(大禮衣), 하의(下衣), 대례복용 바지[大禮袴], 검(劍)과 검대(劍帶), 백포하금(白布下襟: 깃 안에 대는 흰색의 부착물), 백색 장갑[手套] 등으로 구성된다.

대례복의 구성품별 형태를 규정한 「문관대례복제식」은 총 5장 13조로 되어 있다. 제1장은 15조까지이고, 대례복 상의에 관한 규정이다. 제2장은 6조이고, 하의 즉 조끼에 관한 규정이다. 제3장은 7조이고, 바지에 관한 규정이다. 제4장은 89조이고, 모자에 관한 규정이다. 제5장은 10~12조이고, 검(劍)에 관한 규정이다. 13조에서는 별도로 도식을 갖춘다고 명시하였다.

상의는 검은색 모직[羅紗]의 연미복(燕尾服) 형태이고, 깃은 세워지지 않고 눕혀진 형태이며, 앞길 양쪽을 여미면 V자 형상이 된다. 칙임관은 깃, 소매 끝, 주머니, 앞길 전면(全面)에 국가 상징 무늬인 무궁화[槿花]를 표현하였다. 앞길의 무늬는 전체가 하나로 된 모양의 전근화(全槿花)와 절반으로 나뉜 모양의 반근화(半槿花)가 있다. 칙임 1~4등 모두 앞 중심에 반근화 6개(한쪽에 3개씩. 양쪽 길을 합하면 전근화 3개가 됨)가 있고, 그 양쪽 옆의 전근화로 신분을 차별화한다. 칙임 1등은 총 6개, 2등은 총 4개, 3등은 총 2개가 표현되고, 4등은 반근화만 있고 전근화는 없다. 무궁화의 주변은 줄기로 꽉 채운다. 주임관은 줄기만 있고 무궁화는 없다. 조끼와 바지는 검은색 모직이다. 모자는 검은색 벨벳[천아융]으로 만든 산형 모자(bicorn)이고, 위쪽에 깃털 장식이 있는데 칙임관은 흰색이고 주임관은 검은색이다. 모자, 상의, 검에 무궁화가 표현되어 신분을 구별하고, 바지는 요철문(凹凸文)으로 신분을 구별한다. 이상과 같이 칙임관과 주임관 모두 앞길 전면에 무늬를 표현하는 것은 대한제국의 독자적 양식으로 일본과는 차별화되는 것이었다.

1900년의 위 제도는 1904년(광무 8)과 1905년(광무 9)에 일부 개정되었다. 큰 변화는 없지만, 앞길에 표현한 무늬의 형태가 일부 개정되었다. 1904년에는 칙임관 내에서의 무늬 차별을 없애고, 14등 모두 반근화 6개와 전근화 6개로 통일하였다. 1905년 1월에는 상의 앞길 무늬를 칙임관은 1등(전근화 6개)과 24등(전근화 4개)의 두 종류로 차별화하고, 주임관은 무늬를 모두 없앴다. 칙임관 대례복의 앞길에는 무늬를 표현하고 주임관은 완전히 없애는 것은 일본과 같은 방식이다.

1900년 제정된 대례복은 1904년과 1905년에 일부 개정되지만 옷의 기본 형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1906년 12월 12일 전면 개정에서 옷의 형태가 바뀌고, 앞길의 무늬는 칙임관까지도 완전히 없앴다. 또 친임관(親任官)에 관한 규정이 추가되었다.

1906년 개정에서 두드러진 변화는 깃이 스탠딩 칼라로 바뀌고, 앞길 양쪽을 단추로 여며서 목까지 올라오는 형태라는 점이다. 친임관과 칙임관은 깃, 소매 끝, 주머니에 무궁화와 줄기를 표현하고, 친임관은 견장(肩章)이 추가되었다. 주임관은 깃, 소매 끝 주머니에 무궁화 줄기만 표현하였다. 이때 개정된 제도를 일본 문관 대례복과 비교하면, 일본보다 등급이 낮아진 형태임이 확인된다. 일본 칙임관의 대례복은 앞길 전면에 무늬가 있고 주임관만 없는데, 1906년에 개정된 대한제국 칙임 문관 대례복은 앞길의 무늬를 완전히 없애 일본 주임관과 같은 형태로 만든 것이다.

변천사항

1900년에 최초로 제정된 우리나라 문관의 서구식 대례복은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한국 병탄 이후 더 이상 착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일제는 한국 병탄 직후인 1910년 9월 30일 칙령 제354호로 「조선총독부관제」를 공포하였고, 이에 근거로 하여 1911년 6월 23일 칙령 제176호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직원 복제」를 공포하였다. 이 복식 제도에서는 일본 제복 착용이 규정되었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멸망부터 1911년 6월 조선총독부 복제 공포 이전까지는 통감부(統監府) 직원들이 착용한 일본의 제복이 착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1900년 대한제국 문관의 서구식 대례복은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시점까지 착용되었고, 그 이후에는 일본 제복이 착용되었다.

의의 및 평가

「문관대례복제식」은 최초의 서구식 대례복이라는 점과 국가 상징 무늬로 무궁화를 사용한 점에 의의가 있다. 당시 국가 상징 무늬로 무궁화를 정하게 된 배경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대례복 규정을 외교관부터 적용하게 하였고, 현재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제작한 옷이 남아 있으므로, 대외적으로 대한제국의 정체성을 옷으로 표현하면서 서구 열강과 대등한 주권 국가임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종실록(高宗實錄)』
『법규류편(法規類編)』
『(구한국)관보(官報)』

단행본

이경미, 『제복의 탄생』(민속원, 2012)

논문

최규순, 「대한제국기 궁내부 대례복 연구」(『정신문화연구』 31-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최규순, 「1905~1906년 서구식 대례복제도 개정에 나타난 일제의 한국병탄 준비」(『한국독립운동사연구』 39,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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