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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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 광해군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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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문헌
조선후기 제15대 왕 광해군의 재위 기간 동안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다룬 실록.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광해군일기』는 조선 후기 제15대 왕 광해군의 재위 기간 동안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다룬 실록이다.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중초본과 정초본 두 종류가 남아 있다. 원래 실록 편찬을 완료하면 초고로 사용한 중초본은 없앤다. 최종 원고인 정초본만 인쇄해 사고에 보관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런데 『광해군일기』는 중초본을 없애지 않고 태백산사고에 보관하였다. 이 중초본에는 정초본에 없는 광해군 관련 기사가 있고 내용을 수정·가필한 모습도 생생하다. 이 덕분에 광해군일기는 당시 실록 편찬 체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목차
정의
조선후기 제15대 왕 광해군의 재위 기간 동안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다룬 실록.
개설

1608년 2월부터 1623년 3월까지 광해군 재위 15년 2개월 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사실을 다루었다. 187권.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중초본(中草本, 太白山本) 64책과 정초본(正草本, 鼎足山本) 39책의 두 종류가 남아 있다.

내용

『광해군일기』는 1623년(인조 1) 이수광(李睟光) 등이 광해군 당시의 시정기(時政記)에 무필(誣筆)이 많다고 하여 이를 수정할 것을 제의했으나, 재정 궁핍 등의 이유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1624년 1월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광해군 때의 시정기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 사료가 될 기록들이 춘추관의 서리 홍덕린(洪德麟)의 헌신적인 수습에도 불구하고 많이 흩어져 없어지고 말았다. 이에 이괄의 난이 평정된 뒤, 광해군 때에 주서(注書)를 지낸 사람들의 가장일기(家藏日記)를 수합해 『승정원일기』를 보수하게 하였다. 또 춘추관에 명하여 당시 사관(史官)으로 있던 사람들의 가장사초(家藏史草)와 각처에 남아 있던 조보(朝報) · 야사(野史) 등을 수집하게 하였다.

다만 광해군은 물러난 왕이기 때문에 시정기만 수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시정기만으로는 왕위에 있었던 광해군의 실록을 실질적으로 대신할 수 없어 1624년 2월 29일 춘추관의 건의로 『광해군일기』를 편찬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해 6월, 일기편찬의 찬수청(纂修廳)을 남별궁(南別宮)에 설치하고 총재관(摠裁官) 윤방(尹昉)을 중심으로 1 · 2 · 3방으로 나누어 편찬을 시작하였다. 기본 사료인 시정기와 『승정원일기』 등이 대부분 이괄의 난 때 흩어져 없어졌기 때문에 부득이 광해군 즉위 이후의 조보와 사관의 가장된 사초, 사대부 집안의 소장인 일기, 상소문의 초고, 야사 · 문집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 정리해 편찬하였다.

편찬 사업은 1627년의 정묘호란으로 한때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632년 2월에 다시 찬수청을 남별궁에 설치하고 윤방을 총재관으로 하여 1 · 2 · 3 · 4방으로 나누어 편찬을 계속, 이듬해 12월에 완성되었다. 편찬된 일기는 곧 인쇄에 착수했으나, 물력 부족으로 한달 동안 광해군 즉위년 2월에서 6월까지의 5권과 그 해 7월과 8월의 일부만을 인쇄하는 데에 그쳤다. 이에 정부에서는 정초본을 여러 벌 등사해 각 사고(史庫)에 나누어 분장(分藏)하기로 하였다. 1634년 정월부터 등록관(謄錄官) 50인을 임명하고 4반으로 나누어 정서하기 시작하여 그 해 5월에 2부의 정초본을 작성하였다.

실록 편찬을 완료하면 초초(初草)와 중초는 세초(洗草)하고 정초본을 인쇄해 사고에 보관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광해군일기』는 불과 2부를 등사했을 뿐이어서 중초본을 세초하지 않고 이를 64책으로 꾸며서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에 보관하였다. 정초본 2부는 강화도의 정족산사고와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에 나누어 분장하였다. 그 뒤 1686년(숙종 12)과 1794년(정조 18) 두 차례에 걸쳐 인쇄, 출판이 논의되었으나,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광해군일기』의 중초본은 먹 또는 붉은 먹과 검은 먹으로 수정해 삭제 또는 보첨(補添)한 부분이 많다. 게다가 크고 작은 부전(附箋)이 허다하게 붙어 있으며, 각 면의 상하 난 외에 가필, 보첨한 부분이 많고 거의 초서로 쓰여 있다.

이 중초본을 보면 실록편찬의 실상을 알 수 있는데, 실록이 아닌 일기라 할지라도 실록과 다름없는 과정을 거쳐 편찬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다만, 『광해군일기』는 사료의 산일 뿐만 아니라 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이 주도가 되어 편찬했기 때문에 그들의 주관이 작용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 뒤 실록은 민족항일기에도 영인되었고, 광복 후에는 국사편찬위원회가 태백산본을 8분의 1로 축소, 영인해 국배판 48책으로 간행하였다. 이 실록 가운데 『광해군일기』의 중초본은 태백산본으로 26∼31책에 수록되었으며, 정초본은 정족산본으로 31∼33책에 모두 수록, 영인되었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찬수청의궤(纂修廳儀軌)』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한국사료해설집』(신석호, 한국사학회, 1964)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관」(신석호, 『사총』5, 1960)
『光海君時代の滿鮮關係』(稻葉岩吉, 大阪屋號書店,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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