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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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의 각화사(覺華寺) 부근에 있던 조선 후기의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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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의 각화사(覺華寺) 부근에 있던 조선 후기의 사고.
내용

외사고(外史庫)로 1606년(선조 39)에 설치하였다. 이보다 앞서 왜란 중에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본(全州史庫本)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1603년부터 3년 동안의 노력 끝에 실록 3질을 새로 인출하였다. 이로써 실록은 저본 1질, 신인본 3질, 초본(草本 : 교정본) 1질 등 모두 5질이 되었으며, 5질의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5사고가 정비되었다.

태백산사고는 1605년 10월 경상감사 유영순(柳永詢)태백산의 입봉지하(立峰之下)가 사고지(史庫址)로서 적당하다고 보고하자,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여 공사에 착수하였다. 다음해 4월 사고 건축을 완성하고 신인본 1질을 봉안해 외사고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 뒤 1634년(인조 12) 이 사고의 위치에 대한 논란이 있자, 대교 유황(兪榥)이 그곳에서 1리쯤 떨어진 서운암(棲雲庵) 뒤에 새 사고지로서 적당한 곳이 있음을 보고했으나 곧바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 뒤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으나 태백산 중록(中麓)에 위치한 서운암 부근 현재 사고지로 이건되었다. 한편, 사고지가 있는 각화산은 태백산 줄기이기는 하지만 주봉(主峰)보다 남쪽으로 약 12㎞ 떨어진 지점에 있다. 옛날에는 이 일대의 산을 모두 태백산이라고 불렀다.

태백산사고의 건축양식은 처음에는 주1만이 방삼간(方三間) 2층의 기와집이고 다른 건물은 단층이었으나, 고종연간에 가서 실록각(實錄閣)이 2층으로 개축된 것 같다. 수호 사찰은 각화사였고, 따라서 수호총섭(守護摠攝)도 각화사의 주지가 맡았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태백산사고의 수호군(守護軍)은 25인이었다 하나, 시기와 자료에 따라 차이가 많다. 1905년 태백산사고의 중건비로 7,251원이 책정되기도 하였다.

1910년 일제의 주권침탈 이후 태백산사고의 실록은 규장각도서와 함께 종친부(宗親府) 자리에 설치한 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옮겨 보관하다가, 1930년 규장각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으로 이장(移藏)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1955년부터 1958년까지 이 태백산사고본 실록을 저본으로 해 축쇄영인본 48책을 간행해 학계에 보급하였다. 그 뒤 태백산사고본 실록은 1985년 3월 부산의 정부기록보존소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사고(史庫)

참고문헌

『명종실록』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인조실록』
『여지도서』
『대동지지』
『한국사료해설집』(신석호, 한국사학회, 1964)
『사고지조사보고서』(국사편찬위원회, 1986)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어첩(御牒)ㆍ왕실 족보ㆍ어필(御筆) 따위를 보관하기 위하여 만든 전각.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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