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 ()

조선시대사
개념
조정이 입장을 대변할 의도에 따라 관에서 주도하여 편찬한 정사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재야의 인사나 조정의 관료에 상관없이 개인적인 관심에 따라 편찬한 역사서.
이칭
이칭
야승(野乘), 패사(稗史), 외사(外史), 사사(私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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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관에서 편찬한 역사, 즉 정사(正史)와 대립되는 의미로 야승(野乘) 또는 패사(稗史)·외사(外史)·사사(私史)라고 하였으며, 대체로 개인이 저술한 역사서를 말한다. 주로 풍속과 전설 등을 취급하여 정사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거나, 오류를 시정하는데 활용되기도 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사보다 당대의 역사상을 더 많이 보여 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정의
조정이 입장을 대변할 의도에 따라 관에서 주도하여 편찬한 정사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재야의 인사나 조정의 관료에 상관없이 개인적인 관심에 따라 편찬한 역사서.
[정의]

조정이 입장을 대변할 의도에 따라 관에서 주도하여 편찬한 정사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재야의 인사든 조정의 관료든 상관없이 개인적인 관심에 따라 편찬한 역사서.

[연원 및 변천]

중국의 경우 당나라에서 송 · 명 대까지는 ‘관찬이 아닌 민간의 사사로운 기록’이라고 하였고, 명나라 후반인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까지는 ‘국초 이래 당대까지의 고사를 다룬 국조사(國朝史)의 형태’라고 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16세기 이후 개인 저술이라는 의미로서 당대 왕조사를 다룬 것을 야사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조전 전기만 하더라도 사찬의 당대 왕조사로서 관찬 실록을 보완할 수 있는 내용이 수록되었으면서도 야사라고 하지 않고, 잡기 · 총화 · 냉화 · 쇄록 · 일록 등으로 불렀다.

우리나라 야사 편찬은 일찍부터 있었다. 신라시대에는 김대문(金大問)『계림잡전(鷄林雜傳)』 · 『화랑세기(花郎世紀)』, 최치원(崔致遠)의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 등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박인량(朴寅亮)『고금록(古今錄)』, 이제현(李齊賢)『역옹패설』, 일연(一然)『삼국유사』 등이 있다. 김관의(金寬毅)『편년통록(編年通錄)』, 정가신(鄭可臣)『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 민지(閔漬)『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와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 이제현의 『세대편년(世代編年)』 등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 외에도 많은 야사가 저술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초기에는 야사의 저술이 활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495년(연산군 원년)의 기사( 『연산군일기』 연산군 원년 11월 14일(계사))에 검토관 이관(李寬)이 경연 자리에서 “고려에서는 야사가 있었는데, 아조(我朝)에 이르러 폐지되었다.”라 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야사의 편찬이 통제된 것은 무엇보다도 찬반론이 엇갈리는 역성혁명에 원인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야사의 특성으로 볼 때, 찬반이 엇갈리는 건국 사건에 대한 평가를 우려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5세기 후반에 정치 · 사회적인 분위기의 반전과 함께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면서, 시대사조 역시 변화가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의 반전과 함께 야사의 편찬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15세기에 야사의 시원으로 꼽히는 서거정(徐居正)『필원잡기』성현(成俔)『용재총화』는 조선의 야사 발달에 큰 영향과 자극을 주었다. 고려 이래 전하는 일화 · 한담을 모은 『필원잡기』이세좌(李世佐)의 발문에, “우리 동국(東國)의 일들을 널리 모아 조종(祖宗)의 업적에서부터 여항(閭巷)의 풍속에 이르기까지 사관(史官)들이 기록하지 않은 것을 빠짐없이 갖추어 적었다.”라고 하였다. 『용재총화』는 문화(文話) · 시화(詩話) · 서화(書話) · 인물평 · 사화(史話) · 실력담(實歷譚)으로 구성하였는데, 황필(黃㻶)의 발문에, “국사에서 갖추지 못한 것을 이 책이 실었다.”라고 하였다. 이후 야사 저술은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주로 사림파 계열의 인사들에 의해 활발해졌다.

[내용]

정사는 중국에서 편년체의 역사에 대립된 의미로 『사기』 · 『한서』 · 『후한서』 · 『삼국지』 등 기전체의 역사를 말하고, 편년체의 『춘추』 · 『자치통감』 등은 고사(古史)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장학성(章學誠)은 그의 『사적고(史籍考)』에서 기전체와 편년체를 함께 정사로 동등하게 취급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 · 『고려사』 등 기전체의 역사를 정사라 하였고, 넓은 의미에서 관에서 편찬한 『고려사절요』 · 『동국통감』과 역대왕의 실록 등도 동일한 범주로 이해했다.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도서해제(朝鮮圖書解題)』에서는 사부(史部)를 정사류(正史類 : 삼국사기 · 고려사), 편년류(編年類 : 동국통감 · 동사강목 · 고려사절요 및 역대의 실록 등), 기사류(紀事類 : 징비록 · 창의록 · 강도일기 등), 별사류(別史類 : 동국사략 · 해동역사 · 열조통기 · 연려실기술 등), 야승류(野乘類 : 역옹패설 · 삼국유사 · 용재총화 · 필원잡기 · 소대수언 · 대동야승 등)와 정법류(正法類) · 기록류(記錄類) · 지리류(地理類) · 금석류(金石類) · 전기류(傳記類)로 나누었다.

이에 의하면 기전체 역사가 아니면 관에서 편찬했더라도 정사에 해당되지 않으며, 일기 등 기록이나 편년체 · 별사체(別史體)로 엮은 역사는 민간 개인이 편찬했더라도 야승(야사)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하였다.

이러한 분류법은 어느 정도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야사라는 일반적 통념으로 볼 때 괴리감이 있다. 그것은 정사의 경우에도 같은 점이 있다.

[특징과 의미]

조선시대 야사에서 크게 주목되는 것은 16세기 후반 허봉(許篈)『해동야언(海東野言)』과 『해동야언별집(海東野言別集)』이다. 전자는 태조부터 명종 때까지 175년간의 수록류(隨錄類)를 토대로 한 편년사(編年史) 형식이고, 후자는 선조 이후 허봉이 직접 견문한 사실을 수록류로 엮은 야사이다. 일사유문(逸事遺聞: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의 집성이라는 점보다, 태조 이래 선조 때까지의 역사의 흐름을 하나로 묶어 정리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야사에서 또 하나 크게 주목되는 것은 야사를 총서(叢書)로 편찬한 것이다. 최초의 것은 정도응(鄭道應)『소대수언(昭代粹言)』이다. 『소대수언』은 모두 13편으로, 내용은 허봉의 『해동야언』 · 『해동야언별집』, 이이(李珥)의 『석담유사(石潭遺事)』, 우성전(禹性傳)『계미기사(癸未記事)』, 김시양(金時讓)『자해필담(紫海筆談)』 등 선조 중반에서 광해군인조 중반까지의 수록류 야사를 모아 편찬한 것이다.

야사의 총서 편찬은 이후에 더욱 성행해 홍중인(洪重寅)『아주잡록(鵝洲雜錄)』, 이의철(李宜哲)의 『대동패림(大東稗林)』 등이 있다. 그러나 야사의 총서로서 대성된 것은 『대동야승(大東野乘)』김려(金鑪)의 『광사(廣史)』를 들 수 있다.

『대동야승』은 언제, 누가 편찬했는지 자세하지 않다. 다만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 별집』의 야사류 속에 이름이 보여 『연려실기술』 이전, 즉 숙종 말년에서 영조 사이에 편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수록된 야사는 모두 59종으로, 성종 때 성현의 『용재총화』]부터 인조김시양의 『부계기문(涪溪記聞)』으로 끝을 맺고 있다. 『광사』는 모두 143종이 수록되어 있어 야사의 총서 가운데 가장 방대한 분량이다.

한편, 허봉의 『해동야언』과 같이 편년사, 즉 통사의 형식으로 집대성된 것으로 안정복(安鼎福)『열조통기(列朝通記)』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이 있다. 『열조통기』는 1392년(태조 1)부터 1765년(영조 41)까지의 역사 사실을 여러 책에서 뽑아 엮은 것이고, 『연려실기술』은 태조부터 현종까지 역대의 사실을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로 엮은 것이다.

야사는 정사에서 확인할 수 없는 역사 사실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역사적 의미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당대사를 이해하는데 실록만큼은 아니지만, 당대의 다양한 역사 사실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일부의 경우는 실록에 없는 내용을 수록하고 있어, 실록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 자료로서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야사는 당대사의 이면을 기록 · 전수하려는 의도가 강했던 역사서의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참고문헌

단행본

『야사총서(野史叢書)의 개별적연구(個別的硏究)』(중앙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78)
『야사총서(野史叢書)의 총체적연구(總體的硏究)』(중앙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76)

논문

김경수, 「조선조 외사의 설치와 운영」(『역사학보』 154, 역사학회, 1997)
김경수, 「조선전기 야사 편찬의 사학사적 고찰」(『역사와 실학』 19·20, 역사실학회, 2001)
김경수, 「조선후기 김려의 야사총서 편찬과 그 의미」(『한국사연구』 119, 한국사연구회, 2002)
신상필, 「조선조 야사의 전개와 『한고관외사』의 위상」(『대동한문학』 22, 대동한문학회, 2005)
안대회, 「패림과 조선후기 야사 총서의 발달」(『남명학연구』 20, 남명학회, 2005)
안대회, 「조선후기 야사 총서 편찬의 의미와 전개」(『민족문화』 15,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1992)
이태진, 「조선시대 야사(野史) 발달의 추이와 성격」(『우인김용덕박사정년기념사학논총』, 1988)
황운종, 「한국사 연구에 있어 정사·야사의 위치」(『석당논총』 15,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1989)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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