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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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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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제10대 왕 연산군의 재위 기간 동안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다룬 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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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 제10대 왕 연산군의 재위 기간 동안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다룬 실록.
내용

연산군의 재위 기간인 1494년 12월에서 1506년 9월까지 11년 10개월 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 63권 46책. 인본(印本).

편찬은 연산군 사망 직후인 1506년(중종 1) 11월에 시작되었다. 폐위된 왕의 사실 편찬이므로 일기수찬(日記修撰)이라는 명목 하에 일기청이 설치되고, 대제학 김감(金勘)이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1월에 김감이 대신 암살 사건에 연루, 유배되어 편찬 작업이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대제학 신용개(申用漑)가 감춘추관사가 되어 편찬이 곧바로 재개되었다. 그러나 3개월 후, 편찬의 공정을 위해 연산군 때 은총을 받은 인물은 교체해야 한다는 의정부의 건의로 편찬관이 교체되었다.

이에 편찬 책임자로서 총재관(摠裁官) 성희안(成希顔) 이하 도청당상(都廳堂上) 2명, 각방당상(各房堂上) 4명, 색승지(色承旨) 1명이 다시 임명되어 본격적인 편찬이 이루어졌다. 이때 참여한 편찬 실무자인 수찬관·편수관·기주관·기사관 등의 명단은 여타 실록과 달리 부기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당시 기사관으로 참여했던 권벌(權橃)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일기세초지도(日記洗草之圖)』에 의해 그 전모를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위의 편찬 책임자의 성에도 약간의 변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감춘추관사인 성희안은 변동이 없지만,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성세명(成世明)·신용개 등 6명, 동지춘추관사가 조계상(曺繼商)·이유청(李惟淸) 등 8명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 편찬 책임자의 교체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찬관으로 강경서(姜景敍)·이세인(李世仁) 등 5명, 편수관으로 유희저(柳希渚)·김근사(金謹思) 등 24명, 기주관으로 이현보(李賢輔)·이사균(李思鈞) 등 7명, 기사관으로 이말(李抹)·성세창(成世昌) 등 16명이 참여하였다.

이 진용 하에서도 편찬의 추진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것은 여러 차례에 걸친 연산군의 시정기(時政記)가 조사명령으로 인해 당대에 이미 직필(直筆)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사관(史官)이 정청(政廳)·경연(經筵) 등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에 임명된 인물 중 총신(寵臣)이 많아, 당대 사료의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었다.

또한, 반정 이후 사관들의 활약이 위축된 상황하에서 무오사화의 충격으로 역대 사관들이 사초(史草)를 제대로 제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편찬관들도 후환을 두려워해 직을 사양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이루어진 『연산군일기』는 1509년(중종 4) 9월에 완성되어 실록봉안(實錄奉安)에 따른 제반의식을 간략히 치른 뒤 외사고(外史庫)에 봉안되었는데, 편찬방식은 후일 『광해군일기』 편찬의 규범이 되었다.

이 일기는 봉안·관리에 있어서는 실록에 비해 차별이 있었지만, 내용 및 체재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이 책은 대개 한 권에 1, 2개월분의 사실을 수록했지만, 이따금 6, 7개월분을 수록한 것도 있다.

내용 면에서는 앞에서 살핀 것처럼 무오사화로 인한 후유증 및 연산군의 사관에 대한 탄압으로 정희량(鄭希良)·이종준(李宗準)의 사초를 제외한 대다수의 자료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소략한 면이 많이 보인다.

또한 다른 실록과 달리 사론(史論)이 극히 적어 25개 정도만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조차 주로 왕 및 왕에게 총애를 받은 사람들의 비행에 대한 것이다.

기사 내용에 있어서 무오사화가 일어난 왕 4년 이전까지는 왕도정치·도승(度僧) 및 사원전(寺院田)·내수사장리(內需司長利) 문제 등에 대한 대간들의 상소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4년 이후 갑자사화가 일어난 왕 10년까지는 대간의 상소와 왕의 전교(傳敎)가 반반을 차지하고, 그 뒤 폐위까지는 무오사화·갑자사화에 연관된 인물들의 치죄(治罪)와 연락(宴樂)에 관한 왕의 전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외관계에 있어서 대명관계는 극히 소략하나 야인(野人)의 회유·정토(征討)문제와 왜인(倭人)의 토산물 진봉(進封)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왕의 시문 및 그에 화답한 관료들의 시가 많이 실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개인에 대한 서술에서 사림파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에 대해서는 간략한 사실만 기록하였다. 이에 비해 총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서술을 하는 동시에 사론(史論)의 형태를 취해 많은 비판을 첨가하고 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일기세초지도(日記洗草之圖)』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한국사료해설집』(신석호, 한국사학회, 1964)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관」(신석호, 『사총』 5,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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