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학자 김대문이 화랑들의 행적을 모아 엮은 전기이다. 김대문은 진골귀족으로 성덕왕 때 한산주 도독이 되어 이 책을 지었다고 한다. 이 책은 『고승전』 과 함께 김대문의 중요한 저술로 꼽히나 『삼국사기』에 한 구절이 인용되어 있을 뿐 현존하지 않는다. 이 책의 화랑은 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진흥왕대부터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대까지로 화랑제도의 본래 모습을 가장 잘 전해 주는 기록으로 보고 있다. 1989년에 필사본이 발견된 후 박창화에 의한 위작설이 제기되는 등 진위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화랑세기(花郞世紀)』는 진골귀족(眞骨貴族) 출신으로 704년(성덕왕 3)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이 된 김대문(金大問)이 『고승전(高僧傳)』 · 『악본(樂本)』 · 『한산기(漢山記)』 · 『계림잡전(鷄林雜傳)』과 함께 저술하였는데, 오늘날에는 모두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는 『화랑세기』의 한 구절이 인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삼국사기』가 찬술되었던 고려 때까지는 남아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 화랑들의 전기는 『고승전』과 함께 김대문의 가장 중요한 저술로 꼽힌다. 이와 같은 화랑의 전기를 『삼국사기』 김흠운전(金歆運傳)의 사론(史論)에서는 ‘김대문의 세기’라 하였고,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郎碑序)』에서는 ‘선사(仙史)’라 하였으며,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서는 ‘세기(世記)’라고 하였다.
다만, 김대문은 8세기 초 사람이므로 이 전기에 소개된 화랑은 신라의 화랑 전체가 아니라, 그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던 진흥왕(眞興王)대로부터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文武王)대까지의 화랑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기를 참고했을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대부분 삼국 및 통일기 초의 화랑들이 올라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따라서, 이 전기는 화랑제도의 성격이 크게 달라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신라 말에 최치원이 쓴 ‘선사’라든지, 고려 후기 각훈이 쓴 ‘세기’와는 달리 화랑의 본래 모습을 가장 잘 전해준 기록이라 할 수 있다.
1989년에 필사본 『화랑세기』가 발견되고, 다시 1995년에는 이른바 그 모본(母本)이 알려졌는데, 여기에는 32명의 풍월주(風月主)의 계보와 그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박창화(朴昌和)에 의한 위작설(僞作說)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박창화에 의해 위작되었다고 보는 경우, 모본 필사본 『화랑세기』를 보다 더 진본(眞本)으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초록본(抄錄本)을 따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박창화의 『화랑세기』외의 다른 저술들이 역사를 소재로 하면서 주요 모티프가 성관계라는 것이 필사본 『화랑세기』와 동일하다는 점에서 필사본 『화랑세기』를 위작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본(眞本)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수록된 향가인 「송사다함가(送斯多含歌)」의 향찰 표기, 또 『화랑세기』에서의 ‘노(奴)’와 ‘비(卑)’의 용례가 조선시대의 천민 개념이 아닌 고대의 왕족을 제외한 모든 신분층을 일컫는 개념으로 쓰였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이후에도 필사본 『화랑세기』를 둘러싼 진위 논쟁은 화랑의 계보, 색공(色供)의 역사적 접근, 인용 고사에 대한 분석, 향가 · 향찰에 대한 고찰 등 구체적인 내용의 실증 작업을 토대로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