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때 과거에 급제해 요직을 여러 번 거친 뒤 1277년(충렬왕 3)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 정5품)에 임명되었다. 1280년(충렬왕 6)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이 퇴직하기를 청하자 승지(承旨)로서 왕명을 받아 이를 물리쳤다. 1290년(충렬왕 16) 세자가 원나라에 갈 때 세자의 스승으로서 민지(閔漬)와 함께 수행하였다. 같은 해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최함일(崔咸一) 등 31명을 선발하였다.
1291년(충렬왕 17)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종2품)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했으며, 첨의찬성사 세자이사(僉議贊成事世子貳師, 정2품)에 임명되었다. 1294년(충렬왕 20)에는 원나라의 성종이 한림학사 살자만(撒刺蠻)을 통해 고려가 귀부한 연월을 물어오자 정가신이 글로 답하였다. 1295년에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취하고, 강훤(姜萱) 등 27명을 급제시켰다.
1296년(충렬왕 22)에 왕이 상화연(賞花宴)을 향각(香閣)에서 베풀자 축하하는 시를 올렸는데, 왕은 도첨의낭사(都僉議郎舍)와 금내육관(禁內六官) 및 학관(學官)에게 명해 상화내연시(賞花內宴詩)를 써서 화답하였다. 1297년에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 종1품)에 임명되었다.
1298년(충렬왕 24)에 왕에게 글을 올려 첨의중찬으로 퇴관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5일에 한 번씩 조회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곧 벽상삼한삼중대광 수사공(壁上三韓三重大匡守司空)이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별세하였다.
성품이 정직하고 엄정해 일을 처리하는 데 법도가 있어 나라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정가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이 있다. 거소에 편액(扁額)하기를 설재(雪齋)라 하고, 매일 현사(賢士) · 대부(大夫)로 고금(古今)을 의논하니, 벼슬이 대관에 올랐어도 행동은 서생과 같았다고 한다.
고려 호경대왕(虎景大王)으로부터 제24대 원종까지의 일을 기록한 역사서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찬집하였다. 그 밖에도 많은 사령(辭令)을 지었다. 정가신의 열전(列傳)이 『고려사』 권105에 실려 있다.
충선왕 묘정(廟廷)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