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예조정랑, 도원수,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이듬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는데,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 영해(寧海)로 이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정랑 · 병조정랑 · 수찬(修撰) · 교리(校理)를 역임,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25년(인조 3) 응교(應敎)가 되어 문학을 겸했고, 이듬해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산릉역(山陵役)에 공로가 많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자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의정부의 의논에 따라 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인조 12)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었다. 그 뒤 한성판윤을 거쳐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 ·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 되었다가 9월에 다시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6년(인조 14) 청백리에 뽑혀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1641년(인조 19)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할 때 대제학 이식(李植)과 총재관(總裁官) 홍서봉(洪瑞鳳) 등의 추천으로 다시 판중추부사 겸 춘추관사를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안질로 실록개수(實錄改修)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다.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하담집(荷潭集)』 · 『부계문기(涪溪聞記)』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하담집(荷潭集)』
- 『용주유고(龍洲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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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문과 급제 : 『국조문과방목』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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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이원익 도체찰사의 종사관 : 『인조실록』 4권, 1624년(인조 2) 1월 24일. "관서 지방 인심의 안정을 위해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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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시호 추증 : 『숙종실록』 23권, 1691년(숙종 17) 윤7월 21일. "좌의정 심희수 등에게 문정 등의 시호를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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