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초(史草)는 사관(史官)들이 매일매일의 시정(時政)과 득실(得失), 관리들의 현부(賢否)나 비행(非行)을 기록한 것으로, 시정기(時政記)라고 하였다. 매달 1책 혹은 2책으로 묶어 매년 마지막 달에 왕에게 책수(冊數)만 보고하고, 춘추관(春秋館)에 보관했다가 실록 편찬 시 이용하였다. 비밀이 엄격히 지켜져 실록의 편찬이 완료되면, 세초(洗草)를 통해 물에 빨아 재생 종이로 활용되었다.
춘추관에서 공적으로 작성한 시정기는 일종의 공적 사초였다. 시정기는 첫째 줄에 연월일 ‧ 간지(干支) ‧ 날씨, 각 지방에서 일어난 특이 사항을 쓰고, 둘째 줄에는 왕이 있는 곳, 경연(經筵)의 참석 여부, 왕에게 보고되거나 명령이 내려진 사항을 쓰도록 되어 있었다.
왕명과 관계되는 것도 원칙이 있어서, 먼저 입시(入侍)하여 설명하는 일은 내용의 요점만 기록하고, 연혁(沿革)과 시비(是非)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썼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아뢰는 것은 무조건 기록하였으며, 여러 번 되풀이되면 내용에 첨가된 것만 더 쓰도록 하였다.
의식과 예법은 후일에 참고가 된다고 판단되면 번거로워도 모두 기록하였고, 과거 급제자는 누구 외 몇 명이라고 썼다. 관리의 임명은 고관(高官)만 쓰되 지방관의 임명과 특별 임용의 경우나, 임용에 물의가 있을 때는 아무리 하찮은 관리라도 모두 이름을 쓰도록 하였다. 공식적으로 작성된 사초 이외에 가장(家藏) 혹은 사장(私藏)의 사초가 있었다.
세종 때 사초에 대한 기록을 보면, 사관은 비밀스러운 일이나 개인의 인물됨 등을 따로 가장사초로 작성해 두도록 하고, 시정기는 부본(副本)을 충주사고에 두도록 하였다. 가장사초는 사관이 개별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관했다가 실록을 편찬할 때 춘추관에 제출해야 했다. 또한 사관은 사초를 절대로 누설할 수가 없도록 하는 법적 조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초는 간혹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사화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연산군 대에 발생한 무오사화(戊午史禍)가 대표적이다. 따라서 초기에는 가장사초를 제출할 때 작성자의 성명을 기입하지 않았으나, 정변이 몇 차례 발생된 뒤로는 가장사초의 납입(納入) 때 사초 작성자의 성명을 기록하게 하였다. 한편 왕은 실록뿐만 아니라 사초도 볼 수 없었다. 폭군이었던 연산군이 재위 10년이 지난 뒤 가장사초를 작성하지 못하도록 명한 일이 있었지만, 사초를 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