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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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실록 편찬을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
이칭
이칭
실록찬수청(實錄纂修廳)
제도/관청
설치 시기
각 왕대의 사왕(嗣王) 즉위 후
폐지 시기
실록편찬 종료 후
상급 기관
춘추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실록 편찬을 위해 설치한 춘추관의 임시 관청이다. 선왕에 대한 졸곡이 끝나면 춘추관에서 전원 겸직으로 관원을 임명하였으며, 도청 및 3방의 당상과 낭청이 있어 사초,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각 관청의 기록을 모아 산절, 초고 작성, 간행을 맡았고, 완성된 뒤 세초와 봉안으로 임무를 마쳤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실록 편찬을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
기능과 역할

조선시대 역사를 기록하는 관청은 이원적 구조를 띠고 있었다. 당대 정사(政事)를 기록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춘추관(春秋館)영사(領事)로부터 기사관(記事官)까지 모두 겸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통상 한림(翰林)으로 불리는 사관(史官)이 전임으로 근무하는 곳은 예문관(藝文館)의 참외관(參外官)이었고, 이들이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 2인, 대교(待敎) 2인, 검열(檢閱) 4인이었다. 이들도 관제로 보면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예문관의 사관을 전임 사관, 춘추관의 사관을 겸임 사관이라고 부른다. 춘추관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실린 법적 규정이었다면 실록청은 실제로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 관청이므로 춘추관 규정과는 관원 배치에 차이가 있었다. 선왕(先王)이 세상을 뜬 뒤 사왕(嗣王)의 졸곡(卒哭)이 끝나 정무를 보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서 설치되어 선왕 시대의 역사를 편찬하는 관청이었다. 실록청의 조직은 춘추관 관원 규정을 근거로 편성되었다. 영의정이 겸임하는 영사(領事), 좌 · 우의정이 겸하는 감사(監事), 판서급이 겸하는 지사(知事), 참판급이 겸하는 동지사(同知事), 6승지와 홍문관 부제학 및 대사간이 겸하는 수찬관(修撰官, 이상 당상관), 그리고 의정부 · 육조 · 승정원 · 홍문관 · 예문관 ·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 사헌부 · 사간원 · 승문원(承文院) · 종부시(宗簿寺)의 당하관이 겸임하는 편수관(編修官) · 기주관(記注官) · 기사관 등이 있었다.

실록청 인원은 편찬 대상이 되는 선왕의 재위 기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편찬할 업무량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가장 많은 관원이 투입된 실록청은 『숙종실록』을 편찬할 때로서, 당상관 68인, 당하관 188인, 도합 256인이었다. 실록청의 최고 책임자는 초기에 영사 또는 감사였으나 『광해군일기』를 편찬할 때부터 총재관(總裁官)이라 하였다. 실록 편찬의 작업과 관련해 실록청의 조직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는 『인조실록』 권말에 부기한 편찬 관계자의 명단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총재관은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도청당상(都廳堂上)에는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와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도청낭청(都廳郎廳)에는 편수관을 비롯해 기주관 · 기사관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실록청을 삼방(三房)으로 나누어 각방 당상(各房堂上)은 지춘추관사 · 동춘추관사 · 수찬관으로 구성하였으며, 각방 낭청에는 편수관 · 기주관 · 기사관 등이 소속해 있었다. 현전하는 실록청의궤들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실록 편찬의 단계는 (1) 1,2,3방에서 시정기의 내용을 검토하여 실록에 수록할 부분을 뽑아내는 ‘시정기 산절’, (2) 도청에서 시정기 산절 내용에 여타 자료를 참고하여 ‘초초 작성’, (3) 실록 '초초'의 체재를 통일하고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중초 작성’ (4) 중초 내용을 분판에 옮겨 적은 다음 활자를 조판하여 시험 인쇄 및 교정 진행, (5) 여러 차례의 시험 인쇄를 통해 더 이상 오류가 없으면 실록 정본 인쇄 및 장정 등으로 진행되었다. 흔히 말하는 '정초'는 실록을 필사본으로 제작할 때 최종 완성된 정본을 의미하는 것으로, 실록이 활자로 간행되고 활자 조판을 위한 분판 서역의 과정이 생긴 이후로는 정초 제작을 하지 않았고, 분판 서역 자체를 정초라고 부른 듯하다. 실록청이 설치되면 임금 재위 시의 시정기와 사초를 필두로 『승정원일기』 · 『의정부등록(議政府謄錄)』과 각 관서의 기록, 개인의 문집 등 공사 기록을 널리 수집해 임금이 즉위한 날로부터 사망한 날까지의 사실을 날짜별로 기록, 실록을 편찬하였다.

변천

조선 초기부터 실록청의 찬수범례가 확립되었으리라 판단되지만 실록의 찬수범례가 현존 사료로 확인되는 것은 『인조실록』 편찬에서이다. 이후 내내 14개항의 찬수범례를 통하여 실록을 편찬하였는데, 이는 『정조실록』 편찬 때부터 27개항으로 바뀌었다. 이는 『일성록』 찬수범례인 유본예(柳本藝)의 『영각규례(瀛閣規例)』가 실록 편찬에 반영된 것이다. 갑오개혁 이후 예문관이 궁내부에 속하고, 내각은 기록국과 문서과가 맡는 이원적(二元的) 체계가 됨에 따라, 춘추관 실록청의 실록 편찬 기능은 제5조 8항, 사실상의 ‘기타 조항’으로만 남았다. 내각 기록국에는 편록과, 관보과, 사적과가 있었다. 편록과에서 ① 내각 기록의 편찬 보존에 관한 사항, ② 조칙 및 법률 칙령의 원본과 기타 공문의 보존에 관한 사항을 담당했고, 관보과에서 관보(官報)의 편찬과 발행을 맡았다. 이는 실록과 실록청이 왕정(王政)과 유기성을 띠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원전

『경국대전(經國大典)』
신석호, 『한국사료해설집』(한국사학회, 1964)

단행본

金慶洙, 『朝鮮時代史官硏究』(국학자료원, 1998)
裵賢淑, 『朝鮮實錄硏究序說』(태일사, 2002)
오항녕, 『한국사관제도성립사연구』(일지사, 2009)
오항녕, 『실록이란 무엇인가』(역사비평사, 2018)
오항녕, 『후대가 판단케하라』(역사비평사, 2018)

논문

차용걸, 「실록·사관·사고에 대하여」(『사고지조사보고서(史庫址調査報告書)』, 국사편찬위원회, 1986)
강문식, 「조선왕조실록 연구의 통설 재검토」(『규장각』 49,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6)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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