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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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년부터 1606년까지 실록청에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역대 실록을 인쇄하기 위하여 만든 목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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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603년부터 1606년까지 실록청에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역대 실록을 인쇄하기 위하여 만든 목활자.
내용

임진왜란 후 주자인쇄가 회복되기까지의 실록들을 찍어내기 위하여 만든 목활자들을 총칭하기도 한다.

난을 겪는 사이에 전주사고(全州史庫)를 제외한 내외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이 병화로 소실되어, 흩어진 옛 주자(鑄字)를 수습하고 목활자를 만들어 섞어 사용하여 우선 역대 실록을 찍어냈다.

이후 계속 나라 사정이 어려워 목활자를 만들어 ≪선조실록≫·≪인조실록≫·≪효종실록≫을 차례로 찍어냈는데, 이들 활자를 실록자라고 부른다.

조선왕조는 초기부터 내사고(內史庫)인 춘추관과 충주·전주·성주에 외사고(外史庫)를 두어 역대 왕의 실록을 간직해 왔는데, 그것이 임진왜란을 겪는 사이에 전주사고의 것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난국이 수습되자 조정에서는 소실된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 왕의 실록을 인출하여 보존하는 방법을 논의한 끝에 서울의 남별궁(南別宮)을 실록청(實錄廳)으로 정하고 흩어진 옛 주자를 수습하는 한편, 목활자를 만들어 섞어 사용하여 그 소실된 실록을 새로 찍어내기로 하였다.

그 인쇄작업은 1603년 7월에 착수하여 2년 10개월이 걸려 1606년 4월에 완료되었다. 이 때 새로 인쇄된 실록은 정본(正本)이 3부이고, 교정용으로 쓰인 방본(傍本)이 1부였다.

그 중 정본은 춘추관의 내사고를 비롯한 묘향산외사고(妙香山外史庫)·태백산외사고(太白山外史庫), 방본은 오대산외사고(五臺山外史庫), 그리고 원본(原本)은 마니산외사고에 각각 봉안하였다.

그 뒤 춘추관의 내사고본은 1624년(인조 2)의 이괄(李适)의 난으로 소실되고, 묘향산외사고본은 1633년에 후금(後金)과의 외교관계가 악화되어 적상산외사고(赤裳山外史庫)로 옮겼으며, 마니산외사고본은 1678년(숙종 4) 같은 강화도내의 정족산에 새로 마련한 외사고로 옮겨 보관하였다.

일제 때 오대산외사고의 방본은 일본에서 가져갔고, 적상산외사고의 신인본은 창경궁의 장서각(藏書閣)으로 옮겨졌는데 6·25전쟁 때 북한이 반출해 갔다.

원본과 태백산외사고의 신인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원본만 간직되어 있고, 태백산외사고의 신인본(新印本)은 정부가 세운 고문서 보존소로 또다시 이관되었다.

그 중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는 신인본을 조사해 보면 ≪태조실록≫부터 ≪태종실록≫까지, ≪문종실록≫부터 ≪성종실록≫까지, ≪중종실록≫ 일부(32년 5월∼39년 12월)와 ≪인종실록≫·≪명종실록≫까지는 갑인자와 그 글자체를 닮은 목활자를 만들어 섞어 찍었고, ≪세종실록≫·≪연산군일기≫·≪중종실록≫ 일부(32년 4월까지)는 을해자와 그 글자체를 닮은 목활자를 만들어 섞어 찍었다.

한편, 1609년(광해군 1) 7월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1616년 11월에 완성하고 1617년에 찍어낸 ≪선조실록≫을 보면, 갑인자체 목활자와 을해자체 목활자에 새로 만든 목활자를 많이 섞어 쓰고 있어 글자체가 상잡(相雜)하다.

위의 13대 실록은 주자가 많이 섞여 있어 인쇄가 비교적 깨끗한 편인데, 이 ≪선조실록≫은 대부분 목활자이고 새김이 거칠어 인쇄가 조잡한 편이다.

이전에는 13대 실록과 ≪선조실록≫을 찍은 활자를 모두 ‘선조실록자(宣祖實錄字)’로 일컬어 왔으나, 그 차이가 뚜렷하므로 후자만을 일컬음이 옳다 하겠다.

≪인조실록≫은 1653년(효종 4)에 인출되었는데, 당시의 실록찬수청(實錄纂修廳)이 마련한 의궤(儀軌)에 따르면, 궐자(闕字)와 보자(補字)를 새로 만들기 위하여 황양목(黃楊木)을 여러 도에서 많이 가져오게 하고, 또한 각자장(刻字匠)도 여러 곳에서 많이 징용하였다. 대대적으로 목활자를 만들어 충용(充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목활자의 대부분은 ≪선조실록≫을 찍은 활자보다 약간 크고 경오자체(庚午字體)의 필의(筆意)를 보여주는 자체인 점에서 역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를 ‘인조실록자(仁祖實錄字)’라 일컫고 있다. 1657년에 인출된 ≪선조수정실록≫도 이것과 같은 계통의 목활자이다.

≪효종실록≫은 1661년(현종 2)에 인출하여 사사고(四史庫)에 봉안하였다. 이 실록을 찍어낸 목활자도 전대(前代)의 실록을 찍은 활자와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활자의 크기가 ≪인조실록≫의 경우보다 작은 편이고 글자체가 바르고 선명하며 단정한 필서체인 것이 그 특징이다.

그 목활자의 새김은 여러 곳에서 차출된 각자장이 담당하였는데, 도각이 이전의 여러 실록보다 정교하여 인쇄가 깨끗하고 또렷하다. 이 활자를 ‘효종실록자(孝宗實錄字)’라 부르고 있다. →활자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대왕실록찬수청의궤(仁祖大王實錄纂修廳儀軌)』
『효종대왕실록찬수청의궤(孝宗大王實錄纂修廳儀軌)』
『한국의 고활자』(손보기, 한국도서관학연구회, 1971)
『한국고인쇄기술사』(김두종, 탐구당, 1974)
『한국전적인쇄사』(천혜봉, 범우사, 1990)
『한국목활자본』(천혜봉, 범우사, 1993)
『한국서지학』(천혜봉, 민음사, 1997)
「이조후조(李朝後朝)의 주자인쇄」(김원룡, 『향토서울』 7, 1959)
「임진란후의 활자인본실록자(活字印本實錄字)와 훈련도감자」(김두종, 『진단학보』 29·30, 1966)
「조선후기활자본의 형태서지학적연구」상(백린, 『한국사연구』 3,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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