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상(伯尙).
1603년 성균관에 입학했다가 학행으로 천거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 ·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 · 순안현령(順安縣令)을 지냈다. 광해군 때 여러번 내외 관직에 보직되었으나 국정이 문란함을 보고 나아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을 계기로 벼슬길에 나아가 익찬(翊贊) · 사어(司禦)를 거쳐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익찬으로서 뒤늦게 강화도로 가서 봉림대군(鳳林大君) · 인평대군(麟坪大君) 등을 배종, 호위하였다.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적에게 포로가 되어 항복을 강요당하였다.
“내 목은 끊을 수 있으나 너희들 앞에 무릎은 꿇을 수 없다.” 하여 끝내 순절하였다. 1657년(효종 8) 좌승지에 추증되고, 뒤에 고향인 강화에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다. 1811년(순조 11)에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강화의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저서로는 『혜국지(惠局志)』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