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은 『현종실록』을 추후에 수정한 역사서로, 정식 이름은 『현종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개수실록(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改修實錄)』이다. 모두 28권 29책으로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1680년(숙종 6) 허견(許堅)과 윤휴(尹鑴)의 옥사가 경신환국으로 이어져, 갑인예송(甲寅禮訟) 이후 귀양, 파직 등으로 조정에서 멀어졌던 김수항(金壽恒) 등이 복귀하였다. 판교(判校) 정감(鄭勘)은 『현종실록』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개수를 건의하였다. 허목(許穆)이 ‘선조(先朝)에 정치가 어지러웠다’는 등의 말을 했고, 총재관을 맡은 권대운(權大運)과 실제 편찬 책임자인 민점(閔點)이 같은 인식이었으므로, 역사 왜곡이 있으리라는 주장이었다. 김수항은 첫째, 일정한 범례나 사실 기재의 요령이 없다. 둘째, 『승정원일기』만 증빙 자료로 써서 경솔하게 만들었다. 셋째, 상소 등의 기록이 곡절을 알 수 없게 소략하다. 넷째, 인대, 입시 설화의 기록에 맥락이 없다. 다섯째, 주요 전장을 상소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찬술한 뒤 교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개수에 힘을 실었다. 민정중(閔鼎重)은 실록이 사실대로 기록되지 않았고 왜곡의 가능성이 있음을 제기하였다. 『현종실록』 편찬이 시작되었을 때 대제학으로 실질적인 책임을 맡았던 김석주(金錫胄)도 민점(閔點)이 대제학이 된 뒤 정령(政令)의 변통, 전곡(錢穀) · 갑병(甲兵) · 형옥(刑獄) 등과 같은 일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1680년 7월 29일에 실록 개수청을 구성했다. 개수이기 때문에 시정기를 산절하는 일이 없으므로, 각 방(房) 당상과 낭청은 차출하지 않고 도청(都廳)만 두었다. 총재관은 대제학을 지낸 영의정 김수항이 맡았다. 이어 8월 4일에 당상과 낭청을 임명하여 실록 개수의 진용을 갖추었다. 『현종실록』의 개수는 『현종실록』을 편찬할 때와 조건이 같을 수 없었다. 실록 개수청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당초 실록을 찬수한 뒤에 시정기(時政記)를 이미 세초(洗草)하였기 때문에 따로 고증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종 재위 기간인 기해년(1659)에서부터 갑인년(1674)까지 사관(史官)이 사사로이 간수하고 있는 초본(草本)을 수납하도록 하였다. 혹시 사관이 사장(私藏)하고 있는 사초가 있으면 그것이라도 가져오게 한 것이다. 동시에 『승정원일기』도 관례대로 이송해 오게 했다. 아울러 실록 원본도 택일하여 실록 개수청으로 실어오게 했다. 이렇게 실록 개수 준비를 마친 10월 26일, 숙종의 왕비 인경왕후(仁敬王后)가 경덕궁(慶德宮)에서 세상을 떴고, 그에 따라 실록 개수청은 일단 업무를 중단해야 했다. 가져왔던 『현종실록』 원본도 다시 봉안했다. 1681년(숙종7) 국장(國葬)이 끝나고 3월 13일 다시 실록을 이안(移安)해 왔다. 다소 곡절은 있었지만 1683년(숙종9) 1월 15일에 『현종개수실록』은 인출 작업을 마쳤고 담당 관원의 수 일부를 줄였다. 모두 28권을 인출했고, 다섯 곳의 사고에 분장하기 위해 총 1백 40권을 장황(粧䌙)한 뒤에 공장(工匠)들도 감하(減下)했다. 개수를 마치고 『승정원일기』를 다시 승정원으로 반납하고, 초초, 중초 등은 세초할 때까지 춘추관에 보관하도록 했다. 추후 더 세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겠지만, 두 실록의 차이를 보면 원본에 내용이 실려 있지만 개수본에서 더 많은 내용을 추가한 경우가 있다. 또한 원본에 상소 사실만 기록되어 있거나 아예 상소 사실 자체가 기록되지 않은 기사에 대해 상소 내용을 보완하거나 상소 사실과 내용을 보완한 경우도 있다. 경외(京外) 관원들에 대한 출척이나 시비의 경우도 평가에서 차이가 크게 나타났다. 편찬에 관여한 실록청 관원은 총재관(摠裁官) 김수항(金壽恒), 도청당상 이단하(李端夏) · 신정(申晸) · 이민서(李敏敍) · 이익상(李翊相) · 김만중(金萬重) · 이선(李選), 도청낭청 신완(申琓) · 김진구(金鎭龜) · 심수량(沈壽亮) · 심유(沈濡) · 이세백(李世白) · 이숙(李塾) 등, 등록낭청(謄錄郎廳) 윤세기(尹世紀) · 이굉(李宏) · 한구(韓構) · 김구(金構) · 윤덕준(尹德駿)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