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동(伯東), 호는 분애(汾厓). 할아버지는 영의정 신흠(申欽)이고, 아버지는 참판 신익전(申翊全)이며, 어머니는 조창원(趙昌遠)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가학으로 학문을 닦았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에 합격, 1664년(현종 5) 음보(蔭補)로 빙고별검(氷庫別檢)에 임명되었고, 그 해에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67년 검열·설서·지평·정언·대교 등을 역임하였다. 1669년부터 1674년까지는 문학·수찬·응교·집의·전라도관찰사·대사간·대사성·평안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 남인들이 집권하자, 서인이 추방될 때 파직당하였다가 3년 후 도승지로 다시 등용되었다. 1679년 한성부좌윤으로 있을 때 남인인 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삭직당하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물러나자 대사헌에 발탁되었다.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죽자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를 맡아보았고, 그 뒤 우참찬·예조판서·공조판서·좌참찬·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개성부유수에 이어 판의금부사로 예문관제학을 겸직한 뒤, 1685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한성판윤을 거쳐 강화부유수로 재임중 죽었다.
바른 정사로 일세의 추중(推重)을 받는 이름난 재상이었고,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관각(館閣)의 전책(典冊)이나 국가의 금석문자를 찬술한 것이 많다. 특히 시에 뛰어나 격조가 청절(淸絶)하다는 평을 받았다. 저서로는 『분애집(汾厓集)』·『분애유고(汾厓遺稿)』·『임진록촬요(壬辰錄撮要)』 등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