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예조판서, 한성판윤, 강화부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675년(숙종 1) 남인들이 집권하자, 서인이 추방될 때 파직당하였다가 3년 후 도승지로 다시 등용되었다. 1679년 한성부좌윤으로 있을 때 남인인 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삭직당하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물러나자 대사헌에 발탁되었다.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죽자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를 맡아보았고, 그 뒤 우참찬·예조판서·공조판서·좌참찬·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개성부유수에 이어 판의금부사로 예문관제학을 겸직한 뒤, 1685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한성판윤을 거쳐 강화부유수로 재임중 죽었다.
바른 정사로 일세의 추중(推重)을 받는 이름난 재상이었고,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관각(館閣)의 전책(典冊)이나 국가의 금석문자를 찬술한 것이 많다. 특히 시에 뛰어나 격조가 청절(淸絶)하다는 평을 받았다. 저서로는 『분애집(汾厓集)』·『분애유고(汾厓遺稿)』·『임진록촬요(壬辰錄撮要)』 등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