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중강(仲綱), 호는 용포(龍浦).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두수(尹斗壽)의 현손이며, 윤휘(尹暉)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윤면지(尹勉之)이고, 아버지는 호조판서 윤계(尹堦)이며, 어머니는 홍영(洪霙)의 딸이다.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같은 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1682년 장령을 거쳐, 1684년 김환(金煥)이 모반을 일으킨다는 무고를 하였을 적에 여기에 동조하지 않고 영흥부사로 좌천되었다.
1687년 예조참의에 이어 우부승지로 재직중 대신에게 엄하게 문책한 비망기(備忘記)의 환수를 청하였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승지로 복직되었고, 1689년 장렬왕후(莊烈王后)가 죽자 고부사(告訃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같은 해 기사환국으로 아버지와 함께 파직, 유배되었다.
그 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 유배에서 풀려나와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 뒤 서북면 출신의 무신도 선전관으로 기용하라는 왕명을 실행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다시 파직되었으나, 1705년 호조판서로 기용되었고 우참찬·한성부판윤·좌참찬·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도(吏道)를 공정히 하였으며, 재능에 따라 적재적소에 임명하였고, 공로에 따라 관직을 높여주기에 힘썼으며, 상벌에 공정을 기하였다. 한편으로는 군율을 엄격히 하였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