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창설 당시 훈련대의 편제는 알 수 없으나 처음 중앙에 2개 대대로 편성되었으며, 1895년 4월 27일에 평양에 제3대대와 윤 5월 16일에 청주군에 제4대대 설치를 국왕에게서 재가 받은 내용이 확인된다. 그해 5월 16일에는 「훈련대 사관양성소 관제」를 마련하였고, 5월 20일에는 훈련대 대원들의 월급을 정교 10원, 부교 9원, 참교 8원, 병졸 5원 50전, 제3훈련대~제6훈련대 소속 병졸의 급료는 3원으로 확정하였다.
훈련대가 연대급 규모로 편제된 것은 1895년 7월 23일부터이다. 훈련 제1대대와 제2대대를 훈련 제1연대로 편제하고, 훈련 제1대대, 훈련 제2대대에 속한 기관(旗官)은 폐지하였다. 이때 훈련 제1연대 본부는 연대장( 정령 또는 부령) 1명, 연대부관(정위) 1명, 연대 기수(참위) 1명, 무기주관( 부위 또는 참위) 1명, 본부 하사 3명(정교 1, 부교 1, 참교 1)으로 구성하였다. 이 편제는 같은 날 시위대에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대대와 중대급까지의 편제와 인원은 다음 달인 8월 25일 확정되었는데, 1개 연대, 2개 대대, 4개 중대로 인원은 총 1,773명이었다.
근대식 군대로서 훈련대는 군대 편제, 훈련 체계, 무기 체계 등에서 모두 일본식 군제의 영향을 받았으며,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이른바 ‘ 을미사변’에까지 가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을미사변은 일부 일본군과 소시〔壯士〕 무리가 경복궁 옥호루에 무장 난입하여 왕후를 시해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일본 측은 이 사건을 당시 해산 위기에 있던 훈련대가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흥선대원군을 추대하고자 일으킨 사건으로 축소하였다. 그러나 훈련대가 주도적으로 왕후 살해에 관여하였다는 일본 측의 주장은 자신들의 행위를 전가하는 것으로 전혀 설득력이 없다.
왕후 살해 이후에도 훈련대는 그대로 두었고 「군부고시」로 시위대를 훈련대에 이속 편입시켰다. 대대와 중대급까지의 편제 인원은 1895년 8월 25일 확정되었다. 그러나 당시 훈련대를 반대하는 여론이 확산일로에 있었다. 김홍집 정권과 일본 측도 훈련대를 해산하여 자신들에게 향한 비난 화살을 돌리면서 난국을 돌파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훈련대 대대장 이하 지휘관 및 병사들이 일본에 협조하여 왕후 살해에 가담하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조야의 여론이 끓어오르게 되자 결국 훈련대의 폐지가 결정되었다. 이에 처벌을 두려워한 훈련대 제2대대장 참령 우범선 등은 9월 12일 일본으로 도주하였고, 9월 13일 칙령 제169호로 훈련대 폐지 칙령을 내림과 동시에 같은 날 칙령 제170호 「육군편제강령」을 통해 친위대 ⋅ 진위대의 편제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