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고종 33) 윤 5월 25일 칙령 제120호로 군부대신의 감독을 받아 도성 경비와 궁궐 수비를 전담하기 위하여 연대급 2개 대대로 편성되었고 군부대신이 지휘하였다. 이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이른바 '3국 간섭'에 따라 일본 세력이 약해지자 그간 추진되었던 갑오개혁 시기의 일본식 군제 영향력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기획된 것이었다.
시위대 간부는 연대장 1명( 부령), 대대장 2명( 참령), 부관 2명( 부위), 향관 2명(정위), 중대장 4명(정위), 소대장 14명(부참위)으로 구성되었다. 편제는 2개 대대이며, 각 대대에는 2개 중대를, 각 중대에는 3개 소대를 두었다.
1896년(고종 34) 2월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군제가 도입되면서 러시아에서 초빙한 군사교관 푸챠타에게 훈련받은 군사들로 시위대를 다시 조직하였다. 이후 1897년(고종 35) 3월 16일에 조칙에 따라 친위 1, 2, 4, 5대에서 선발한 정예 병사를 훈련시켜 1개 대대급 규모로 다시 창설하였으며, 같은 해 9월 30일 기존 1개 대대(제1대대)와 새로 선발한 병사 1개 대대(제2대대)로 하여 모두 2개 대대로 증편하였다. 시위대는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인 1898년(광무 2) 5월 27일 기존의 2개 대대에 1개 대대를 추가하여 모두 3개 대대 규모의 시위연대로 확대 편제되었다.
시위대는 보병 가운데 1개 중대를 차출하여 포병(砲兵)을 설치하였다. 이 때 처음 설치된 포병은 참령(포병대장) 1명, 정위(중대장) 1명, 부참위(소대장) 4명, 정교 2명, 부교 5명, 참교 8명, 병졸 185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처음 설치 시에는 당분간 군부 포공과장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포병이 다루는 화기는 회선포(回旋砲)와 크라프[克盧伯]였고, 이들 부대는 시위 제1연대에 부속시켰다. 1899년(광무 3) 8월의 칙령에 따라 11월 모두 424명의 인원을 갖춘 시위 기병 1개 대대가 구성되었다.
1900년(광무 4) 9월에 시위대는 2천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02년(광무 6) 10월 19일에 1개 대대를 추가로 설치하여 시위 제1대대와 제2대대는 시위 제1연대로, 시위 제3대대와 추가로 설치된 1개 대대는 시위 제2연대로 하여 모두 2개 연대 규모를 갖추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1905년(광무 9) 4월 22일 칙령 27호로 시위 보병 제1연대 편제가 제정되어 시위대는 시위 2개 연대를 보병만으로 이루어진 1개 연대로 감축되었다. 이후 1907년(광무 11) 4월에 시위 보병 연대는 다시 3개 대대로 재편성되었다.
같은 해 8월에 정미7조약에 따른 군대 해산령으로 서울의 시위대를 비롯한 지방의 진위대 등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면서 폐지되었다. 그러나 시위대 제1대대 대장 박승환의 자결을 계기로, 해산된 시위대 군인들은 무장 시가전으로 항쟁하였고, 이는 항일 무장 투쟁으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