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

근대사
인물
개항기 당상경리사, 독판교섭통상사무, 좌의정 등을 역임한 관리. 정치인.
이칭
경능(景能)
도원(道園), 이정학재(以政學齋)
시호
충헌(忠獻), 김굉집(金宏集)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42년(헌종 8)
사망 연도
1896년(고종 33)
본관
경주(慶州)
관련 사건
아관파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김홍집은 개항기 당상경리사, 독판교섭통상사무, 좌의정 등을 역임한 관리이자 정치인이다. 1842년(헌종 8)에 태어나 1896년(고종 33)에 사망했다. 1867년 벼슬을 시작해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인천 개항 등의 현안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왔고, 이때 가져온 『조선책략』은 개항기 개화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개항기에 각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주요 역할을 맡았고, 온건개화파로서 갑오개혁 등 개화정책을 적극 펼쳤다. 아관파천으로 친러정권이 수립된 후 친일 대신으로 지목되어 광화문에서 군중들에게 타살되었다.

정의
개항기 당상경리사, 독판교섭통상사무, 좌의정 등을 역임한 관리. 정치인.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김굉집(金宏集), 자는 경능(景能), 호는 도원(道園) · 이정학재(以政學齋).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개성부유수 김영작(金永爵)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성혼(成渾)의 후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67년(고종 4) 경과정시(慶科庭試) 문과에 급제한 다음, 이듬해 승정원사변가주서(承政院事變假注書)에 임명되었다. 몇달 뒤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 이어 1870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약 5년간 거상(居喪)하였다. 1873년 복직하여 권지승문원부정(權知承文院副正)에 임명되고, 승문박사(承文博士)를 겸직하였다. 1875년 부사과(副司果) · 훈련도감 · 종사관(從事官)을 지낸 뒤, 약 3년간 흥양(興陽)현감(縣監)을 지냈는데 백성과 정부의 신망을 받았다.

그 결과 내직으로 승진, 1877년 사과(司果), 1878년 남학교수(南學敎授), 이어 호조 · 공조 · 병조 · 예조 참의를 차례로 역임하였고, 1879년 돈녕도정(敦寧都正)을 지냈다.1880년 일본이 요구한 인천 개항, 공사 주차(公使駐箚)와 해관(海關) 세칙(稅則) 등의 현안문제를 타결짓기 위한 제2차 수신사(修信使)로 임명되어 58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에 다녀왔다. 비록 일본 정부와의 협상에는 실패하였으나 황쭌셴[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 정관응(鄭觀應)의 『이언(易言)』을 가지고 돌아와,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들이 개화 정책을 채택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뒤 예조 참판으로 승진하였다.

1880년 말 우리 나라에 온 일본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인천 개항 문제를 협의, 20개월 뒤에 인천을 개항하기로 합의하였다. 아울러 정부가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중추 기구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자, 12월 통상 관계를 전담하는 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에 발탁되었다. 1881년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이 격화되면서 보수 유생들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을 받았다.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소를 올린 끝에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얼마 뒤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되면서 통상사(通商司)당상(堂上)에 임명되었다.

1882년에 미국과, 1883년에는 영국 · 독일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조약 체결을 담당한 전권 대신들의 부관으로 임명되어 협상의 실무 책임을 맡았다. 4월 부제학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호조참판 · 공조참판 · 경기감사를 역임하였다. 특히, 임오군란의 사후 수습책으로 정부에서 일본 및 청나라와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할 때에도 전권 부관으로 임명되어 협상의 실무 책임을 맡았다. 그 뒤 1883년 8월 규장각 직제학을 거쳐 1884년 초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역임한 다음 9월에 예조판서와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를 겸임함으로써 대외 교섭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온건개화파로서 중도 개혁 노선을 견지했는데,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직후 조정에서 뒷수습을 담당할 적임자로 선택되었다. 그래서 좌의정 겸 외무독판(外務督辦)의 중직을 맡아 1885년 초 일본과 한성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해 판중추부사라는 한직에 물러나 있다가, 1887년 재차 좌의정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그 뒤 1889년 수원부 유수로 밀려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일어난 민요(民擾) 로 인해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1894년 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 · 일 양국의 군이 우리나라에 진주하자 총리교섭통상사무(總理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어, 고종에게 민심 수습과 내정 개혁의 필요성을 상주하였다. 1894년 7월 일제는 왕궁을 기습, 점령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청나라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민씨척족정권을 타도하고 내정 개혁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어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신설되자 군국기무처 총재관에 임명되었다.

그 뒤 1894년 12월 군국기무처가 해체될 때까지 제1차 갑오개혁을 주도하여, 과거제 폐지, 새로운 관리 임용법의 채용, 은본위(銀本位) 신식 화폐제도의 채택, 의정부궁내부의 관제 시행, 새로운 도량형 제도의 채택 등 약 210건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박영효(朴泳孝)와의 연립 내각이 수립되자, 내정 개혁의 목표로서 「홍범 14조」를 발표하여 제2차 갑오개혁을 실시하였다. 이때 의정부는 내각으로, 각 아문은 부(部)로 개편되고 7부의 제정, 군제 개편 등의 개혁이 있었다.

그러나 1895년 5월 재정 궁핍으로 개혁이 중단된 상태에서 박영효와의 갈등, 수구파와 급진파간의 갈등 심화 등으로 인해 총재직을 사임하자, 박정양(朴定陽) · 박영효의 연립 내각이 수립되었다. 그 뒤 박영효의 주도로 일어난 역모 사건이 탄로나 일본으로 망명하자, 같은 해 7월 재차 입각하여 친미(親美) · 친러파(親露派)와 제휴로 이뤄진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제3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때 명성황후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자, 열세에 몰린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그런데 김홍집 내각은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철처하지 못해, 시종 반일 · 반외세의 처지에 있던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 정권이 수립되자 ‘왜대신(倭大臣)’으로 지목되어 광화문 앞에서 군중들에 의하여 타살되었다.

저술활동

유고집으로 『김총리유고(金總理遺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10년 충헌(忠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묘지는 경기도 파주시 임진면에 있었으나, 6 · 25사변 후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대자리로 이장하였다.

참고문헌

『이정학재일록(以政學齋日錄)』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매천야록(梅泉野錄)』
『속음청사(續陰晴史)』
『수신사행기록(修信使行記錄)』
『개화기의 김총리』(도원상공기념사업추진위원회, 1978)
『김홍집유고』(고려대학교출판부, 1976)
『한국통사』(박은식, 대동편역국, 1915)
「김홍집의 생애와 개화사상」(정제우, 『사학연구』36, 1983)
「열강각축의 제물 김홍집」(이선근, 『인물한국사』7, 신화출판사, 1977)
「경신수신사김홍집과 황준헌저 ‘조선책략’에 관한 재검토」(이선근, 『동아논총』1,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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