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리기무아문 ()

근대사
제도
1880년(고종 17) 12월 21일 변화하는 국내외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외의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총괄하는 업무를 관장하던 정1품아문(正一品衙門) 관청.
정의
1880년(고종 17) 12월 21일 변화하는 국내외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외의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총괄하는 업무를 관장하던 정1품아문(正一品衙門) 관청.
역사적 배경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한 뒤, 주로 대외관계의 변화에 대응한다는 필요성에서 신설된 것이나 대외관계만을 전담하는 기구는 아니었다.

이 아문이 설치되는 직접적인 계기나 설치 이유 또는 설치 경위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 사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배경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1877년 11월에 일본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가 청나라의 총리아문 부속기관인 동문관(同文館)에서 전 해에 번역, 간행한 『성초지장(星軺指掌)』의 내용을 빌려서 외교사무를 전담하는 대신의 필요성과 그 임무, 외국공사와의 관계, 사신의 상주문제, 외국기술의 수입 및 유학생의 파견 등을 조선정부에 종용하였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신식무기의 수입과 그 제조법의 학습을 위한 교섭이 청나라와 진행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기구의 신설, 즉 이 아문의 신설이 거론되었다는 사실이다.

신무기 제조법의 학습, 즉 군계학조사(軍械學造事)가 추진된 것은 1879년 8월이다. 청나라의 긍정적인 회답을 받은 고종은 다음해인 1880년 4월에 조정 회의를 거친 후 5월에는 유학생을 위한 육조천인(六條薦人)을 명하였다.

7월에는 변원규(卞元圭)를 청나라에 파견해 군계학조사를 정식으로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대해 청나라에서는 제기(製器)·구기(購器)·연병(練兵) 등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과 세목을 결정해 이 해 11월 1일 조선정부에 통보하였다.

이와 같이, 군계학조사가 확정되자, 고종은 그 해 12월 5일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情) 문제를 관장하는 새로운 아문의 설치를 명하였다.

조정에서는 12월 20일 새로운 아문의 절목(節目)을 결정하고, 또한 삼군부(三軍府)를 혁파해 신아문의 처소로 삼았다. 이러한 배경으로 볼 때, 이 아문의 신설은 군계학조사라는 무비자강책과 관련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내용

신설 아문의 절목은 총 22항으로 되어 있다. 제1항에서는 신설아문의 칭호, 제2항에서는 기무에 관한 직분으로 당랑(堂郎)을 차정하는 일, 제3항에서 제14항에 이르는 12개항에서는 각각 사대·교린·군무·변정·통상·군물(軍物)·기계·선함·기연(譏沿)·어학·전선(典選)·이용(理用) 등 12사(司)의 직무를 밝혔다.

제15항에서는 겸관(兼管), 예컨대 사대사와 교린사, 전선사와 어학사 겸관에 관한 것, 제16항에서는 정1품아문으로 하고 대신 중에서 총리를 임명한다는 것, 제17항에서는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이 도상(都相)을 겸한다는 것, 제18항에서는 당상·낭청의 임명, 제19항에서는 서리도례(書吏徒隷)의 임명, 제20항에서는 관아처소를 전 삼군부로 한다는 것, 제21항에서는 예조에서 인신(印信)을 주조한다는 것, 제22항에서는 세칙 결정에 관한 사항 등을 밝혔다.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된 다음 날인 22일에는 영의정 이최응(李最應)이 총리대신으로, 경기감사 김보현(金輔鉉), 지중추부사 민겸호(閔謙鎬), 상호군 김병덕(金炳德), 예조참판 김홍집(金弘集) 등 10명이 당상으로 임명되어 발족하였다.

변천

1895년 3월 칙령 제42호로 외부(外部)로 개편될 때까지 몇 차례의 기구 개편과 명칭 개칭이 있었다. 즉, 1881년 11월에는 12사를 개편, 통합해 동문(同文)·군무·통상·이용·전선·율례(律例)·감공 등의 7사로 했으나, 1882년 6월에 임오군란을 계기로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이 아문은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대원군의 실각으로 이 아문의 후신인 기무처가 7월에 설치되고, 11월에는 통리아문이 설치되었으며(외아문이라 통칭됨.), 다음 달 12월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라 개칭되었다.

이러한 개칭이 있기 직전인 11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외교고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Möllendorff, P. G. von)가 초빙되어 입국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개칭과 개조를 통해 비로소 근대적인 대외관계를 전담하는 기구로 발전한 것이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장정」은 총 23항으로 되어 있다. 장교(掌交)·정각(征榷)·부교(富敎)·우정(郵程) 등 4사와 동문학(同文學)이 설치되었다.(제2∼6항) 관원으로는 독판(督辦)·회판(會辦) 각 1인, 협판·참의 각 4인 및 각 사 주사 8인, 동문학의 장교·주사 각 1인으로 구성되었다(제7∼15항).

이 밖에 인신과 그 사용에 관한 것, 관원의 방빙(訪聘)에 관한 것, 공문주고(公文主稿)에 관한 것, 각 관원의 직분 한계에 관한 것, 숙직에 관한 것, 비밀 유지에 관한 것, 진·출서(進出署)에 관한 것 등이 규정되었다.

이 아문의 기구는 1887년 4월에 또다시 개편되었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속장정」에 의하면 개편된 기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주사가 24인으로 증원되었고, 기구는 총무·통상·교섭·번역·기록·회계 등 6사로 개편되었다.

그 이후 갑오개혁 시기인 1894년 7월 20일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폐지되고 외무아문이 창설되었다. 역시 총무·통상·교섭 이하 6국이 설치되었으며, 관원으로는 대신 이하 협판·참의·주사 등을 두어 교섭통상사무를 관장하고 또한 주외공사·영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다음해인 1895년 3월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외부관제를 정해 교섭국과 통상국의 2국과 대신관방(大臣官房)에 비서·문서·번역·회계 등 4과 및 교섭·통상국에 각각 1·2과를 두어 사무를 분장시켰다. 관원으로는 대신을 비롯해 전임참서관 3인, 국장 2인, 번역관 2인, 번역관보 3인, 주사 12인을 두도록 규정하였다.

그 이후 외부의 관제는 관원에 관한 약간의 개정이 몇 차례 있었으며 1905년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의 한일협상조약으로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일본에 의해 탈취되면서 마침내 1906년 1월 15일 칙령 제5호로 외부의 사무는 의정부 외사국으로 이관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한국근세대외관계문헌비요』(전해종, 규장각도서연구총서1,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동아문화연구소, 1966)
「통리기무아문 설치의 경위에 대하여」(전해종, 『역사학보』17·18합집, 1962)
「영선사항에 대한 일고찰: 군계학조사를 중심으로」(권석봉, 『역사학보』17·18합집,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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