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명(景明). 좌찬성 신서(申緖)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潘南朴氏)로 박영원(朴泳源)의 딸이다. 경사에 능통하고 문예에 뛰어났다.
1820년(순조 20) 음보(蔭補)로 남행선전관(南行宣傳官)이 되었고, 같은 해 무과에 급제하였다. 1826년 함흥부사가 되어 빈민이나 이재민을 잘 구제하였고, 병적처리와 범죄다스리기를 엄정하게 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1838년(헌종 4) 봉산군수가 되어 유생들에게 강무(講武)할 것을 부과하였으며, 흉년이 크게 들자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1851년(철종 2) 전라우도수군절도사, 1860년 좌변포도대장과 총융중군(摠戎中軍)을 지냈으며, 1862년 진주의 황지(潢池) 일대에서 민요(民擾)가 일어나자 절도사로 파견되어 백성을 위무하고, 곡식을 내어 곤궁함을 구원하여 안정시켰다.
흥선대원군의 신임이 두터웠으므로 1864년(고종 1) 어영중군(御營中軍)·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官)·훈련도감중군을 지냈고, 1865년 한성부우윤·홍문관특진관·의금부동의금부사·훈련도정·좌변포도대장 등을 거쳐, 1866년 어영중군이 되었다.
좌변포도대장으로 있을 때 금위영군졸의 치사사건이 일어나 중화부(中和府) 유배가 결정되었으나 곧 용서받았다. 뒤이어 지의금부사·행대호군(行大護軍)·형조판서·총융사·한성부판윤을 지냈다.
1867년에는 판의금부사와 우변포도대장을 지냈고, 1868년 삼군부 복설에 따라 행지삼군부사(行知三軍府事)·지돈녕부사 등을 지냈으며, 1869년에는 지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