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김종득(金宗得), 어머니는 김소사(金召史)이다. 서울 왕십리에서 출생하였고, 신촌에서 살았다.
1882년 6월 5일 도봉소(都捧所)에서 일어난 군료분쟁사건(軍料紛爭事件)으로 아들인 무위영포수(武衛營砲手) 김춘영(金春永)이 유복만(柳卜萬)·정의길(鄭義吉)·강명준(姜命俊) 등과 함께 포도청에 수감되었고 곧이어 처형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지자, 6월 8일 유복만의 동생인 김춘만(金春萬)의 제안에 따라 무위영 군병들의 봉기를 촉구하는 통문을 작성, 왕십리 행수(行首) 송창갑(宋昌甲)에게 전달하여 임오군란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그러나 7월 13일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군사에 의해 피납되고 군란은 실패하였다. 군란 주모자로서 정의길·강명준·유복만·홍천석(洪千石) 등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 수감되었다.
8월 23·24일 양일간에 있었던 금위영(禁衛營)의 추고(推考)에서 발통수창(發通首唱: 통문을 발송하는 일을 우두머리가 되어 주창하는 것)의 동기가 아들을 구하고자 함에 있었음을 밝혔다.
그러나, 대궐을 침범하였다고 주장한 자의 지출(指出)을 끝내 거부하면서 마침내 군란의 주동자였음을 시인하였다. 모반대역부도(謀反大逆不道)로 결안(結案)되어 8월 25일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능지처사(陵遲處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