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사 ()

근대사
제도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부터 주일 조선공사가 파견되기 전까지 네 차례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
제도/관직
설치 시기
1876년(제1차)|1880년(제2차) |1881년(제3차)|1882년(제4차)
내용 요약

수신사는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부터 주일 조선공사가 파견되기 전까지 네 차례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이다. 수신사란 ‘옛 우호를 닦고 신의를 두터이 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일본 사절 파견에 답례로 파견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통상 문제 협상, 정치적 사건 수습 등으로 사절 파견의 성격이 바뀌어 나갔다.

정의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부터 주일 조선공사가 파견되기 전까지 네 차례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
내용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부터 주일 조선 공사가 파견되기 전까지 다섯 차례 사절이 파견되었다. 이 중에 제3차까지는 ‘수신사’, 제4차는 ‘특명전권대신겸수신사’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갑신정변을 수습하기 위해 서상우(徐相雨)와 주1가 파견된 다섯 번째 사절의 공식 명칭은 주2대신’이라 하였으며, 수신사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수신사란 ‘옛 우호를 닦고 신의를 두터이 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일본 사절 파견에 답례로 파견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3 문제 협상, 정치적 사건 수습 등으로 사절 파견의 성격이 바뀌어 나갔다.

제1차

조일수호조규주4 체결 후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사절이 조선 정부에 사절 파견을 요청함에 따라, 두 나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일본의 국정을 탐색하기 위해 주5 김기수(金綺秀)를 수신사로 파견하게 되었다.

수신사 주6 구성을 보면 총인원 76명 중 실제 공무를 담당한 인원은 현석운(玄昔運, 별견당상) · 이용숙(李容肅, 별견한역당상) · 안광묵(安光黙, 반당) · 김용원(金鏞元, 화원) 등 11명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은 악공, 주7, 절월수, 가마꾼 등 주8에 동원된 인원으로, 수신사를 통신사의 연장에서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수신사 일행은 1876년(고종 13) 4월 4일, 고종에게 주9한 후, 29일 부산 초량에서 일본 기선 고류마루〔黃龍丸〕를 타고 부산을 떠났다. 5월 7일 도쿄에 도착하여 20일 동안 체류하고 5월 27일 귀로에 올라 6월 1일 복명하였다.

이들은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예정에도 없던 일본 왕과 만나고, 주10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와 이토 주11〔伊藤博文〕 등 일본 정계 요로로부터 연회에 초대를 받았다. 일본 정부는 근대화 성과를 모두 과시하려 하였으나, 일정의 촉박함과 일본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 등의 이유로 일본 정부가 보여주려고 계획한 시설의 1/6 정도만 선택적으로 시찰하였다.

고종은 사폐하는 자리에서 “저들의 물정을 상세히 살피고 들을 만한 모든 일은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반드시 기록해 오라”고 당부하여, 김기수는 『 일동기유(日東記游)』를, 그의 반당(伴倘)인 안광묵(安光黙)은 『창사기행(滄槎紀行)』이라는 견문기를 남겼다. 주12 사상이 만연한 당시의 분위기에서 김기수의 주13은 곧바로 조정의 개화 정책 실현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였지만, 메이지 초기 일본의 실태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수신사(1880)

재1차 수신사가 귀국한 후, 1876년 8월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통상장정이 체결되었다. 미곡 수출과 무관세 무역을 허용한 이 장정에 따라 막대한 양의 미곡이 유출되었기 때문에 통상장정을 개정하여 관세를 설정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였다. 한편 일본 정부는 1879년부터 인천 개항을 강요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협상하고 일본 정부의 진의와 실정을 탐색하기 위해 1880년 수신사로 김홍집(金弘集)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원역 구성을 보면 총인원 59명 중 실무를 담당한 인원은 당상관 이종무(李宗懋), 별견 한역당상 이용숙, 군관 윤웅렬, 서기 이조연(李祖淵) · 강위(姜瑋), 반당 지석영 등 19명이고 나머지는 의례에 동원된 인원이다. 제1차 수신사와 비교하여 영기수(令旗手) 악공 등이 참여하지 않았지만 절월수, 일산군, 나팔수, 가마꾼 등 여전히 의례적인 요소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었다.

수신사 김홍집 일행은 1880년 5월 28일에 사폐한 후 6월 26일, 일본 기선 센자이마루〔千歲丸〕 편으로 부산을 출발하였다. 7월 6일, 도쿄에 도착한 후 1개월 동안 체류하다가 8월 4일, 귀로에 올라 8월 28일 복명하였다.

김홍집 수신사는 도쿄에 체류하면서 외무성을 예방하는 등 정계를 비롯해 교육계 · 재계 등 각 방면의 인사들과 가까이 지내며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일행 역시 각각 일본 정부의 각 기관과 시설을 견학하여 일본의 발전상과 세계 정세의 동향을 살피고 강력한 개화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김홍집은 이노우에 주14〔井上馨〕 외무경과의 회담에서 미곡의 금수를 요청하였지만, 이노우에는 조선 수출품의 대종이 미곡이라는 이유로 수용하지 않았다. 개항 문제에서도 인천을 개항하는 대신에 그 대안으로 남양만의 마산포를 제시하였지만 이것도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제2차 수신사 파견의 공식적 목적인 관세 설정 문제에서도 주15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 측은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김홍집은 관세를 지방관과 영사가 협의해서 결정한다고 생각하여 전권위임과 초안을 준비하지 않았다.

통상장정의 초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홍집 수신사는 주일 청국 공사 허루장〔何如璋〕, 참찬관 황쭌셴〔黃遵憲〕 등으로부터 일본이 구미와 조약을 개정하려 한다는 정보와 “관세의 결정은 본국이 주가 되어 결정한다”는 관세 주16 개념을 파악하게 된다. 특히 황쭌센은 『 조선책략』을 지어 김홍집이 귀국할 때 전해주었다. 『조선책략』의 유포는 주17의 극심한 반발을 초래하였지만, 통리기무아문의 설치, 조사시찰단의 파견과 미국과의 수교 방침 수립 등 고종의 개화 정책 추진에 활용되었다.

제3차 수신사(1881)

제2차 수신사가 귀국하자 주18주19한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파견되어, 1880년 11월 26일 고종을 알현하고 국서를 주20하였다. 일본의 국서 봉정에 대한 답방으로 조선의 국서를 봉정하고 현안인 관세 설정을 확정하기 위해 파견한 사절이 제3차 수신사이다.

애초에 김홍집을 정사로, 윤태준을 종사관으로 하는 제3차 수신사를 임명하였지만, 김홍집은 개화에 반대하는 유생들의 격한 공격과 대원군의 압박을 받자 몇 차례 주21를 올려 수신사 임명을 거부하였다. 이에 고종은 척사파의 반발을 고려하여 보수파인 조병호(趙秉鎬)를 수신사 정사로 임명하고, 대신 제2차 수신사 수행원이었던 이조연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였다.

위임을 명기한 국서와 예조판서 서한, 조약 개정 초안을 휴대한 제3차 수신사 일행 35명은 1881년 8월 7일 사폐하고, 8월 27일 일본 상선 안네이마루〔安寧丸〕 편으로 부산을 출발하였다. 9월 6일 도쿄에 도착하여 약 45일 동안 체류한 후 귀국하여 11월 29일 복명하였다.

조병호 수신사(정식 명칭은 신사)는 9월 18일 국서를 봉정한 이후, 9월 27일부터 10월 21일까지 모두 6회의 세칙 담판을 전개하였지만, 일본 측은 일반상품의 관세 10%가 고율이란 이유로 지연책을 쓰면서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 조병호 수신사는 이 교섭 과정에서 청국 공사 허루장으로부터, 당시로서는 고율인 이 관세율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이듬해 영일조약의 개정을 기다리거나, 먼저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근거로 세칙을 정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조언을 듣고 교섭을 중단하는 전략을 택하였다.

이전의 수신사와 마찬가지로 제3차 수신사도 일본의 군사, 산업, 교육, 문화시설을 시찰하였으며, 특히 신문사를 방문하여 신문 발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데리고 온 장대용(張大鏞)과 신복모(申福模)는 육군 도야마〔戶山〕학교에서 하사관 수업을, 이은돌(李銀突)은 교도단에서 나팔술 수업을 받게 되었다.

제4차 수신사(1882)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제4차 수신사의 공식 명칭은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이다. 임오군란 이후 이른바 제물포조약조일수호조규속약이 체결되었는데, 속약을 비준하는 권한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특명전권대신’을 칭하게 된 것이다. 제물포조약에서 일본인 사상자 위로금으로 5만 엔, 군대 파견에 따른 보상금인 전보금(塡補金) 50만 엔을 지급하기로 규정하였는데, 이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는 것도 수신사의 임무였다.

제4차 수신사는 정사 박영효, 부사 김만식,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유혁로(柳赫魯) · 박제경(朴齊絅) · 이복환(李福煥) · 김유정(金裕定) · 변수(邊燧) · 변석윤(邊錫胤) · 김용현(金龍鉉) 등 13명으로 구성되었다. 주22김옥균도 동행하였는데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국정 시찰 명목이었지만, 실질적인 임무는 차관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 외 유학시킬 목적으로 박유굉(朴裕宏)과 박명화(朴命和)라는 소년을 데리고 갔다.

제4차 수신사 일행은 1882년 7월 25일에 사폐한 후 8월 10일에 제물포에서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明治丸〕를 타고 출발하였다. 9월 2일 도쿄에 도착하여 약 2개월 반 정도 체류하였다. 11월 18일 귀국길에 올라 11월 28일에 복명하였다.

9월 8일에 국서를 봉정하고, 16일에 이노우에와 협상을 통해 제물포조약에서 5년간 10만 엔씩 지불하기로 한 임오군란 전보금을 10년간 5만 엔씩 지불하기로 하였다. 수신사는 은화가 아니라 당시 약 30% 정도 인플레이션이 된 지폐로 지급하겠다고 협상하였으나, 이노우에는 이를 거절하고 대신 기한을 5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해 준 것이다. 당장 지급해야 되는 사상자 위로금 5만 엔은 요코하마 주23에서 빌려서 해결하였다.

박영효 수신사는 스스로 조선의 ‘공사’를 자처하면서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숙소와 연회장에 국기를 게양하고, 9월 26일 왕비 성절에는 엔료칸〔延遼館〕에서 일본 대신들과 주일 각국 공사들을 초청해서 연회를 개최하였다. 파크스(Harry. S. Parkes) 주일 영국 공사에게는 조영조약의 조속한 비준을 촉구하고, 조선과 조약 체결을 요청한 트리쿠(Arthur Tricou) 주일 프랑스 공사에게는 주24’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면 조약을 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였다. 박영효는 11월 18일에 귀국길에 올랐으나 김옥균은 서광범 · 박제경 · 변수와 함께 약 3개월간 일본에 더 머무른 후에 영국 군함 모헨(moorhen)에 편승해서 귀국하였다.

의의 및 평가

개항 이후 일본과 우호를 두터이 하기 위해 파견한 수신사는 일본의 근대적 문물이 수입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의 개화 정책 추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수신사는 서구의 근대적 외교사절인 공사체제로 넘어가는 도중에 성립된 과도기적인 외교사절이라 할 수 있다. 제1차 수신사는 의례적 성격이 강조되어 통신사의 연장으로 인식하였으나 점차 구체적인 외교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사행으로 그 의미가 변하였다. 특히 제4차 수신사는 실질적으로 공사 역할을 하여 근대적 외교 체제에 적응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조항래, 『개항기 대일관계사연구』(한국학술정보, 2004)
송병기, 『개방과 예속-대미 수교 관련 수신사 기록(1880)초』(단국대학교출판부, 2000)

논문

박한민, 「조선의 대일사절 파견과 대응양상의 변화(1876~1885): 흠차대신 파견을 중심으로」(『한국사학보』 77, 고려사학회, 2019)
이효정, 「19세기말 조선의 근대 외교질서 수용의 한 양상: 대일 사절단의 명칭과 사행원역의 변화를 중심으로」(『한국학논집』 74,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9)
김선영, 「제1차 수신사 사행의 성격: 일본 외무성 자료를 중심으로」(『한국사론』 63,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2017)
이효정, 「19세기 후반 조선 지식인의 독립 국가 지향: 박영효의 『사화기략』을 중심으로」(『고전문학연구』 52, 한국고전문학회, 2017)
현명철, 「제1차 수신사행의 외교사적 위치」(『한일관계사연구』 56, 한일관계사학회, 2017)
이효정, 「제2차 수신사의 일본 견문 태도와 교류의 실제」(『열상고전연구』 51, 열상고전연구회, 2016)
김동철, 「1880년 제2차 수신사의 향서기 박상식의 사행일기 「동도일사」」(『서지학연구』 51, 한국서지학회, 2012)
한철호, 「개화기 박영효 『사화기략』에 나타난 일본 인식」(『동아시아문화연구』 44,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2008)
한철호, 「제1차 수신사(1876) 김기수의 견문활동과 그 의의」(『한국사상사학』 27, 한국사상사학회, 2006)
이헌주, 「제2차 수신사의 활동과 『조선책략』의 도입」(『한국사학보』 25, 고려사학회, 2006)
하우봉, 「개항기 수신사의 일본 인식」(『한일공동연구총서』 2,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2000)
北原マス子, 「第三次修信使の派遣と‘日朝通商章程’の改定·課稅交涉」(『朝鮮學報』 192, 2004)
주석
주1

파울 게오르게 묄렌도르프 남작, 독일의 외교관(1848~1901). 중국 톈진(天津) 영사로 있다가 이홍장의 추천으로 대한 제국의 통리기무아문 협판으로 부임하여 친러시아 정책을 폈다. 저서에 ≪만주어 문전≫이 있다.    우리말샘

주2

황제의 명령으로 보내던 파견인.    우리말샘

주3

나라들 사이에 서로 물품을 사고팖. 또는 그런 관계.    우리말샘

주4

‘강화도 조약’의 정식 명칭.    우리말샘

주5

조선 시대에, 예조에 속하여 판서를 보좌하던 정삼품 당상 벼슬.    우리말샘

주6

벼슬아치 밑에서 일하던 구실아치.    우리말샘

주7

나팔 부는 일을 맡은 사람.    우리말샘

주8

행사를 치르는 일정한 법식. 또는 정하여진 방식에 따라 치르는 행사.    우리말샘

주9

먼 길을 떠날 사신(使臣)이 임금께 하직 인사를 드림.    우리말샘

주10

‘다이조다이진’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    우리말샘

주11

일본의 정치가(1841~1909). 막부 정권 타도에 앞장섰으며, 총리대신과 추밀원 의장을 지냈다. 주한 특파 대사로서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으며, 1905년에 초대 조선 통감으로서 우리나라 국권 강탈을 준비하던 중, 1909년에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되었다.    우리말샘

주12

구한말에, 주자학을 지키고 가톨릭을 물리치기 위하여 내세운 주장. 본디 정학(正學)과 정도(正道)를 지키고 사학(邪學)과 이단(異端)을 물리치자는 것으로, 외국과의 통상 반대 운동으로 이어졌다.    우리말샘

주13

‘사신 행차’를 줄여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14

일본의 정치가(1836~1915). 제1차 이토(伊藤) 내각의 외상과 농상무상, 내상, 장상 등을 지냈으며, 1876년에 전권 대사로 우리나라와 강화도 조약을 맺고 임오군란 때에는 일본 대표로 우리나라와 한성 조약을 맺었다.    우리말샘

주15

임시 외교 사절이 국제회의, 국제 조약 회의 따위에 참석하여 특정 사항에 관하여 국가의 이름으로 외교 교섭을 행하고 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 받은 문서.    우리말샘

주16

국제법에서, 국가가 국내 사항에 속하는 관세에 대하여 임의로 규제할 수 있는 권리.    우리말샘

주17

구한말에 최익현을 중심으로 하여 대외 통상을 반대하고 통상 수교의 거부를 주장하던 당파.    우리말샘

주18

예전에, 외교 사절 가운데 셋째 번 계급. 전권 공사의 아래, 대리 공사의 위였다.    우리말샘

주19

직위가 오름. 또는 직위를 올림.    우리말샘

주20

문서나 문집 따위를 삼가 받들어 올림.    우리말샘

주21

관직에서 물러날 뜻을 글로 써서 임금에게 올리던 일. 또는 그 글.    우리말샘

주22

조선 고종 때의 문신(1860~1914). 자는 우홍(遇鴻)ㆍ자상(子相). 호는 운미(芸楣)ㆍ죽미(竹楣)ㆍ원정(園丁)ㆍ천심죽재(千尋竹齋). 전권 대신으로 미국에 다녀온 후 개화당을 탄압하였고, 고종 폐위 음모로 홍콩에 망명하였다.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다.    우리말샘

주23

외국 무역 금융을 주요 업무로 취급하는 특수 은행.    우리말샘

주24

임금이 명령을 내림. 또는 그 명령.    우리말샘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