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호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내부대신, 궁내부특진관, 의정부의정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
이칭
덕경(德卿)
시호
문헌(文獻)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47년(헌종 13)
사망 연도
1910년(순종 3)
본관
임천(林川)
출생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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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제국기 내부대신, 궁내부특진관, 의정부의정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
개설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덕경(德卿). 서울 출신. 참판 조기진(趙基晉)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66년(고종 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홍문관 관원으로 법규교정소의정관(法規校正所議定官)이 되었다.

그리고 1869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홍문관 응교에 승진하였다. 1872년 동부승지가 되고, 1879년 성균관 대사성, 이듬해 이조 참의를 거쳐 1881년 수신사로 일본에 가서 관세문제를 논의하고 돌아왔다.

1882년 도승지·이조참판에 올라 임오군란 당시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 일행을 장악원으로 피신시켜 보호조처하였다. 민비의 국상 발표에 반대하였고, 청군(淸軍) 입성시에는 우창칭[吳長慶]의 영접관(迎接官)이 되어 안내하였다.

1883년 안동부사가 되어 동래민란과 성주민란의 안핵사(按覈使)를 겸임, 민란을 진압, 처리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후 사대당(事大黨) 중심의 정부조직 때에는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에 특별 발탁되어 일본에 망명중인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의 소환을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등 사대당 정책수행에 노력하였다.

그 뒤 강화부 유수를 거쳐 1885년 공조·예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을 차례로 역임하고, 1886년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1889년 의정부 우참찬·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이듬해 다시 예조 판서를 역임한 뒤 1892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1894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장례원경(掌禮院卿)·궁내부특진관을 거쳐 1897년 탁지부대신·학부대신, 이듬해 다시 탁지부대신이 되었다. 1899년 장례원경·궁내부 특진관을 지내고 1904년 내부대신을 역임한 뒤, 1905년 황해감사에 발령되었으나 부임 전에 다시 탁지부대신·참정대신이 되고, 1906년 의정부의정대신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썼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일성록(日省錄)』
『음청사(陰晴史)』
『매천야록(梅泉野錄)』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속음청사(續陰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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