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당이 형성되면서 김옥균(金玉均)의 알선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1882년 육군도야마학교[陸軍戶山學校]에서 사관교육을 받았다.
이듬해 귀국하자 무과에 배사(拜賜)되어 무관이 될 자격이 주어졌고, 해방사(解放使) 민영목(閔泳穆) 밑에서 교관이 되었다.
그 뒤 박영효(朴泳孝)가 한성판윤에서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전임하여 병권을 가지게 되자, 1883년 이은돌(李殷乭)과 함께 교관으로 채용되어 광주에 있는 군인 1,000여 명을 약 1년 정도 신식으로 훈련시켰다.
이 군인들이 뒤에 친군(親軍) 전영(前營)과 후영에 전속되어 갑신정변 때 신복모의 지휘하에 행동대로 활약하였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때 전위영 병졸 40여 명을 인솔하고 대신들이 출입하는 금호문(金虎門) 밖 진골 근처에 매복하였다가 우정국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대궐에 들어올 민태호(閔台鎬)·민영목·조영하(趙寧夏) 등 사대당 대신들을 저격하려 하였다.
계획은 실패했으나 개화당의 3일천하를 이룩하는 데 중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개화당정권이 수립되자 전위영부령관(前衛營副領官)으로 임명되었으나, 3일천하로 무너지자 도피하였다가 1886년 체포령이 내려져 참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