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 ()

근대사
인물
개항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군국사무아문 주사, 외아문참의 등을 역임한 관리.
이칭
한명(漢明)
소천(小泉)
이칭
변수(邊樹)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1년(철종 12)
사망 연도
1891년(고종 28)
본관
원주(原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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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개항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군국사무아문 주사, 외아문참의 등을 역임한 관리.
개설

본관은 원주(原州). 일명 변수(邊樹). 자는 한명(漢明), 호는 소천(小泉). 할아버지는 변준(邊準), 아버지는 변진환(邊晉桓), 어머니는 강릉(江陵)최씨이다. 아버지의 친구인 강위(姜瑋)에게 배웠다.

생애 및 활동사항

강위가 김옥균(金玉均)과 절친한 사이여서, 김옥균이 1882년 일본을 시찰할 때 수행하였다. 이 때 일본 경도(京都)에서 양잠술과 화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다 그 해 7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군란이 진압되고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자 수신사절인 박영효(朴泳孝)의 수행원으로 김옥균·서광범(徐光範)·민영익(閔泳翊) 등과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차관교섭을 벌여 국채위임장에 대한 보장을 받고 이듬해 3월 귀국하였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1883년 5월 공사 푸트(Foote, A.L.)가 내한하자, 6월 11일 전권대신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홍영식(洪英植)·서광범·유길준(兪吉濬) 등과 함께 미국에 갔다가 이듬해 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인 1884년 7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로 임용되었으며, 8월에는 군국사무아문(軍國事務衙門)의 주사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월 갑신정변 때 대궐 안의 사정을 신속하게 알아내 김옥균 등의 독립당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일본군의 출동을 교섭하여 연경당(演慶堂) 경비를 맡게 되었다. 그 뒤 외아문참의(外衙門參議)로 승진, 전임되었다. 그러나 독립당 내각이 3일 만에 무너지자 독립당 요인들과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郎]를 따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6년 1월 민주호(閔周鎬)·윤정식(尹定植) 등과 미국으로 건너가 베어리츠언어학교를 수료한 뒤, 1887년 9월 메릴랜드주립농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891년 6월 이학사(理學士) 학위를 취득,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생이 되었다.

대학 재학 시절인 1890년부터 미국 농무성 직원으로 근무했으며, 1891년 9월에는 농무성통계국 월보 제89호에 「일본의 농업」이란 글을 싣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해 대학정거장에서 급행열차에 치어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갑신일록(甲申日錄)』
『통서일기(統署日記)』
『윤치호일기(尹致昊日記)』
『한국근세대외관계문헌비고』(전해종, 서울대학교동아문화연구소, 1966)
「한국최초의 미국대학졸업생 변수」(이광린, 『한국개화사의 제문제』, 일조각, 1986)
「Mutel문서(文書)」(정리번호 1892―1888,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구한국외교관계부속문서(舊韓國外交關係附屬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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