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수도 방위를 위해 한성부 주변의 행정적·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주·부·군·현의 일반적인 행정 체계와는 별도로 특수 행정 체계로 유수부를 설치, 운영했다.
초기에는 고려의 국도인 개성과 태조의 어향(御鄕 : 왕가 선대의 관향)인 전주에, 후기에는 개성·강화·수원·광주 등 4도(都)에 설치, 운영하였다.
즉,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 방위 체계의 강화를 절감한 조선왕조는 행정력과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비변사의 기능 강화와 5군영제로의 군제개편을 단행함으로써 도성방어 체제를 강화하였던 것이다.
이곳은 1793년(정조 17) 개성유수·강화유수보다 한 등급 높은 정2품 유수가 임명되는 유수부로 승격되어 유수 2인(1인은 경기관찰사 겸임), 판관 1인, 검률 1인이 소속되었다.
이러한 조처는 왕권 강화를 위해 군제 개혁을 단행해 도성 중심의 내영(內營)과 수원 중심의 외영(外營)으로 구성된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함으로써 수원을 왕권의 배후기지화 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1796년에는 4,600보에 달하는 수원성을 축조하여 수성군(守城軍)을 증강시키고 국왕의 행차시 어가를 호위하게 하는 등 유사시에 대비하게 하였다. 연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395년(태조 4) 양광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된 수원은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에는 진(鎭)을 설치하고 판관을 두었으며, 1526년(중종 21)에 고을사람 가운데 어버이를 죽인 사건이 일어나서 군으로 강등되었다. 진은 인주(仁州 : 현재의 인천)로 옮겼다가 1535년에 다시 수원으로 이전하였다.
1789년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華山)으로 옮긴 이후 1793년 유수부로 승격되고 유수가 장용외사(壯勇外使)와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1802년(순조 2)에 폐합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의 개혁으로 군으로 개편되어 인천부에 소속되었고, 다음 해 경기도관찰부의 소재지가 되었으나 경기도 관찰부는 1910년 서울로 이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