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공윤(公允), 호는 우하(又荷). 민씨척족정권의 대표적 인물인 민영준(閔泳駿: 뒤에 閔泳徽로 개명)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189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904년 일본을 시찰하고 귀국한 뒤 법부협판에 임명되었다. 1907년 학부협판으로 재직할 때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의 을사오적(乙巳五賊) 암살계획에 찬동하여 1만 4000냥을 희사하였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황주(黃州) 철도(鐵島)에 유배되었으나 곧 특사로 풀려났다. 그 뒤 신민회(新民會) 회원이 되어 반일운동에 가담, 『조양보(朝陽報)』의 발행자금과 각종 학회 및 학교에 기부금을 희사하는 등 민족운동을 지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