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때 일제가 민비시해에 훈련대를 동원하였다는 비난을 받게 되자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훈련대를 해산하고, 이른바 육군편제강령을 반포하여 왕성 수비를 위한 중앙군으로 이를 설치하였다.
친위대는 1개 대대에 4개 중대를, 1개 중대에 3개 소대를 편제한 2개 대대를 두었는데, 1개 중대병력은 220인으로 총병력은 약 1,700인이었다. 이듬해 정월 공병(工兵)으로 편제된 친위 제3대대를 설치하였으나, 고종의 아관파천 등 국내정세가 불안해지자 3월에 제4·5대대를 추가로 배치하였다.
또한 공병대 등을 폐지하는 동시에 3개 대대를 합쳐 1개 연대로 만들었다. 4·5대대만으로는 1개 연대가 되지 못하자 이를 독립 대대로 두고, 이에 속하였던 마병대(馬兵隊)를 근대적인 기병대로 독립, 개편하였다.
고종 환궁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친위대도 증강하였는데, 1900년에는 친위연대에 다시 공병 1개 중대와 치중병(輜重兵) 1개 중대를 증설 배속하여 내실을 기하였다. 1902년에는 2개 연대로 증편되었다.
각 연대에 연대장 1인, 부관(副官) 1인, 무기주관(武器主管) 1인, 기관(旗官) 1인이, 각 대대에는 대대장 1인, 향관(餉官) 2인, 부관·정교(正校) 각 1인, 부교(副校) 3인이 소속되었다. 중대에는 중대장 1인, 소대장 4인, 정교·부교·참교(參校) 각 1인, 곡호대(曲號隊) 부교 1인이 소속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이 본격화됨으로써 목적한 큰 효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이 군제개혁의 명목 아래 1905년 군대 감축을 실시, 제1단계로 친위대를 폐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