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의 주요임무는 일반적으로 해상통제, 세력투사, 해군력 시현, 전략적 억제 등으로 구분되며, 임무수행을 위한 주요 수단은 수상함정·수중세력·항공기 등의 입체전략이다. 우리나라가 바다를 통한 본격적인 군사활동을 전개한 것은 문헌상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시대부터이나, 현대 해군의 출현은 1945년 해방 이후부터이다.
해방 후 일찍이 해양에 대한 관심과 기술을 가지고 있던 몇몇 선각자들이 손원일(孫元一)을 중심으로 화합해 해양사상의 보급과 장차 해군 건설에 뜻을 두고 1945년 8월 21일 해사대(海事隊) 조직을 결의했다. 해사대는 서울 안국동 안동예배당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대원 30여 명을 모집해 해사교육을 실시했으나, 재정적 후원이 없어 대원의 식사·피복문제 등의 해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9월 30일 해사대는 석은태(石銀泰)가 이끄는 해사보국단(海事報國團)과 통합해 해사협회(海事協會)로 개칭하고 그 기반을 강화했다. 11월 1일 해사협회는 미군정청과 절충해 해안경비를 수행하기 위한 해안경비대의 조직편성에 합의했다. 해사협회는 미군정 당국의 협조를 얻어 1945년 11월 11일 이미 모집된 70명의 인원으로 구 표훈원(表勳院, 서울 관훈동)에서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설했는데, 이날이 바로 해군창설일이다.
결단식을 마친 다음날 경상남도 진해로 이동한 해방병단은 군항기지 내에 단본부를 설치했다. 다음해 1월 14일 「군정법령」 제42호(해안경비 임무의 국방사령부 이관)에 따라 해방병단은 국방사령부에 편입되어 정식 군사단체로 승인을 받게 되었다. 이어서 6월 15일 「군정법령」 제86호에 따라 해방병단은 조선해안경비대로 새로이 발족했으며, 10월 1일 총사령부를 진해에서 서울로 이전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조선해안경비대는 국방부 훈령 제1호에 따라 해군으로 개칭되었으며, 9월 1일 국군에 편입된 뒤 9월 5일에는 ‘대한민국 해군’으로 정식 호칭되었다. 그러나 법적인 뒷받침은 1948년 11월 30일 「국군조직법」이 공포되고 이어서 「국방부직제령」이 제정됨으로써 1948년 12월 15일 대한민국 해군으로 법제화되었다.
해군은 「국군조직법」에 따라 대한민국의 영역 및 국가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해역에 대해 해상통제권을 장악하고, 그 해역에서 해상작전 및 상륙작전 수행의 임무를 가지고 조직을 편성한다. 해군 참모총장의 호칭은 해방병단 단장과 해안경비대 총사령관을 거쳐 해군 총참모장으로 호칭되다가 1954년 5월 19일 대통령령에 따라 참모총장으로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의 군 조직은 그 사명, 규모, 조직의 구조, 직무의 성질에 따라 조직되며, 해군은 바다를 중심으로 한 전력형성의 극대화를 목표로 조직을 편성한다. 해군은 크게 총지휘부인 해군본부와 그 예하부대로 구분된다. 해군본부는 해군의 편성·장비·작전·병력관리·교육훈련·군수지원, 기타 해군의 운영에 관한 사항을 관장한다. 따라서, 해군본부에는 일반참모부 및 특별참모부서를 두고 있으며, 일반참모부에는 인사·정보·작전·군수·기획관리부서, 특별참모부서에는 감찰·법무·헌병·정훈·행정·통신·시설·의무·군종감실·연구분석실·조함실·비서실 등이 있다.
또한 해군본부의 예하부대로는 해상작전부대인 해군작전사령부, 상륙작전부대인 해병대사령부, 군수지원부대인 군수사령부, 교육부대인 해군대학·해군사관학교·교육사령부 등이 있다.
한국전쟁기 북한의 해군력은 각종 함정 30척과 80여 척의 보조선 등을 포함한 함정세력 및 육전대와 기타 병력을 포함해 약 2만여 명이었다. 반면, 남한은 소해정을 주축으로 한 33척의 함정과 6956명(해병대 1241명 포함)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동·황·남해에서 전투태세에 돌입한 해군은 동해 옥계해상(강원도 명주군 옥계면)에서 6월 25일 북한의 무장수송선과 조우해 50여 분간의 교전 끝에 북으로 격퇴시키고, 상륙정 1척을 격침하고 발동선 1척을 나포(拿捕: 전시에 교전국의 군함이 적국 또는 중립국의 선박을 자기의 지배 하에 두는 행위)했다.
남해에서는 PC-701함이 울산 동방 30마일 해상에서 남진 중인 1000톤 급의 북한 무장수송선을 4시간의 야간추격 끝에 대마도와 부산 사이 대한해협에서 6월 26일 격침시켰다. 한편, 황해에서는 옹진반도 부포(釜浦)에서 LST-801함과 JMS-302·307정이 고립된 육군 제17연대 병력을 인천으로 철수시켰으며, 7월 3일 강화도 수로를 경비 중이던 YMS-502정은 군수물자를 수송하던 40급의 북한선 2척을 격침시켰다.
그 뒤 해군은 동·황·남해에서 본격적인 봉쇄작전을 실시해 해상을 통한 북한군의 침투를 미연에 방지했을 뿐만 아니라 함포지원으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 둔화시키는 등 지상작전을 측면 지원했다.
해군육전대의 전투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동해안 금전·옥계에 1800명, 삼척에 800명, 죽변에 500명 씩 각각 상륙함에 따라 묵호경비부는 60명의 수색대를 출동시켜 3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실탄과 병력부족으로 묵호경비부로 철수해 자체 방위에 임하다가 6월 26일 LST함정편으로 포항으로 철수했다.
묵호경비부 주문진파견대는 북한군 60명이 승선한 적 발동선 1척을 격침시킨 뒤 육군부대와 함께 포항으로 철수했다. 묵호경비부를 흡수, 편성한 포항경비부 육전대는 7월 17일 7시간의 격전 끝에 807고지(구암산)를 점령하고 8월 17일 육군 수도사단과 합동으로 포항탈환작전에 참가해 포항을 완전 탈환했다. 포항경비부 육전대는 크고 작은 전투에서 500여 명의 북한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상륙작전에 앞서 해군은 1950년 8월 16일 인천의 교량이 되는 덕적도를 점령하고 이어서 8월 23일 영흥도를 점령했으며, 유엔군 함정과 연합으로 인천해역 소해작전을 실시, 인천항 내 기뢰제거를 완료해 유엔군 함대의 활동을 용이하도록 했다.
소해(掃海: 바다에 부설한 기뢰 따위의 위험한 것을 제거해 항해를 안전하게 하는 일)장비도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해상탐색을 강화해 동해에서 94개, 황해에서 84개, 남해에서 68개 기뢰를 탐색, 격파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집요하게 북한의 동·서해역에 더욱 많은 기뢰를 부설해 국군 및 유엔군 함정의 작전을 방해하고자 했다. 해군은 제1소해정비대를 창설하고 미해군으로부터 소해장비를 인수받아 전 한국해역에 대한 본격적인 소해작전을 감행했다. 11월 상순에는 북한해역의 기뢰를 상당수 제거해 해상작전을 원활하게 했다.
전세의 불리로 지상군이 철수함에 따라 동해에서는 함경남도 원산(1950년 12월 5일∼8일)에서 10여 만 명의 피난민과 원산전진기지 요원을 LST함정편으로 제주도로 철수시키고, 12월 12일에는 육군 수도사단의 18연대 병력을 함경북도 성진에서 철수시켰다. 가장 대규모적인 함경남도의 흥남철수작전(1950년 12월 12일∼24일)에서 해군은 유엔군 함대와 본격적으로 철수작전을 전개해 12만 명의 병력과 10만여 명의 피난민 등을 해상으로 철수시켰다.
그 밖에 1만 7500대의 각종 차량, 35만 톤에 달하는 군수품을 성공적으로 철수, 호송했다. 한편, 황해에서는 신의주로부터 진남포·해주·인천에 이르는 해상봉쇄를 단행해 안전한 철수를 도왔으며, 12월 5일 진남포주둔부대를 철수시키고, 12월 14일에는 국군·유엔군·피난민 등 8400여 명을 철수시켰다.
옹진·연백지구작전: 남으로 퇴로가 막혀 황해도 장연·송화·은율에 집결한 피난민들의 구출과 유격전을 전개하는 청년의용군을 해군함정이 지원했다. 해군함정들은 1951년 1월 진남포와 옹진해상을 강력히 봉쇄하고 북한군의 침공을 격퇴, 저지시키며 청년의용군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실탄을 공급하는 등 청년의용군을 적극지원했다. 그리고 피난민 구출작전을 계속해 약 6만 2000명을 구출했다.
전략도서 확보작전: 지상의 전선에서 소강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해상에서는 전략도서 확보작전이 감행되었다. 동·황·남해를 강력히 봉쇄하고 있던 해군은 1951년 2월 14일 동해에서 해군함정의 엄호 아래 한국 해병대를 함경남도 영흥만에 있는 여도에 상륙시키고, 이어서 신도(薪島)·소도(小島)·대도(大島)·황토도(黃土島)와 8월 28일에는 함경북도 양도(洋島)에 각각 상륙시켰다.
한편, 황해에서는 1951년 4월 2일 한국 해병대를 경기도의 교동도에 상륙시키고, 이어서 황해도의 백령도·석도·초도 등에 상륙시켰다. 이러한 전략도서의 확보작전은 이들 도서의 주민과 수많은 피난민의 보호뿐만 아니라 국군의 해상작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휴전 이후 북한은 남한에 지하공작거점 확보를 위한 활동을 집요하게 전개했다. 특히, 동·황·남해의 900마일 해상을 이용한 무장간첩선의 침투를 계속해왔다. 북한의 무장간첩선 침투상황의 변모를 분석해보면, 1950년대는 10급 내외의 범선(12노트)으로 휴전선 근해 동·황해로 침투했다.
1960년대는 무장간첩선을 40∼50급 기선저인망형 목선으로 대형화하고 고성능엔진을 부착해 속력을 35노트 이상으로 향상시키고, 해안침투장비를 갖추면서 중무장화해 남해안까지 침투범위를 확장했다.
1970년대는 무장간첩선을 더욱 대형화해 60급의 기선저인망 철선으로 위장, 모선(母船)에 자선을 싣고 무장향상과 속력을 쾌속화(40노트)해 남한 전 해안의 취약지역으로 침투지역을 더욱 확장했다.
1980년대는 공작모선을 70급으로 더욱더 대형화하면서 5급 잠수정을 탑재하고 대공미사일을 장착해 공해상을 이용, 우회침투를 시도하는 등 그 침투방법이 더욱 다양해졌다.
해군은 900마일 전 해상을 방위하면서 해상으로 침투하는 간첩선을 모두 포착, 섬멸하기 위해 동·황·남해에서 강력한 해상경계체계를 구축, 북한의 해상도발을 저지, 격멸하고 있다. 특히 1983년 8월 13일에는 동해 울릉도 근해에서 북한의 무장간첩선 모선을 격침시켰고, 그 해 12월 3일에는 부산 다대포해안에 침투하는 무장간첩선을 격침시켰다. 또한 1985년 10월 20일에는 부산 청사포 근해에서 무장간첩선을 격침시키기도 했다.
1945년 창설된 해군은 1946년 6월 7일 당시 보유함정 5척(100급 2척, 40급 1척, 디젤선 1척, 증기선 1척)과 약간의 상륙주정으로 진해와 인천 근해에서 처음으로 소규모 해상경비를 시작했다. 한편, 1946년 1월 17일 해군 장교 교육의 요람인 해군병학교(해안경비대사관학교·해안경비대학·해사대학·해군대학을 거쳐 1949년 1월 15일 해군사관학교로 개칭)를 창설했다.
1946년 2월 1일에는 조함창(후에 공창으로 개칭)을 창설했으며, 1946년 4월 15일 인천기지를 필두로 목포·군산·포항·부산·묵호 등 전국 주요항구에 해군기지(후에 경비부로 개칭)를 설치했다.
1946년 10월 1일에는 총사령부가 진해에서 서울로 이전함에 따라 진해에 특설기지(후에 통제부로 개칭)를 설치하고, 1947년 10월 15일 부산에 제1특무정대를 설치(정대-1함대-한국함대)해 1948년 6월 경 조직의 기반을 갖추었다. 그리고 1946년 7월 17일 300급 철선(충무공정)을 국내 기술로 건조·진수시켰고, 1948년 8월 30일에는 미 제7함대로부터 38도선 이남 해역 경비업무를 인수받아 해군이 한국해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1948년 10월 여수반란사건의 진압작전에서 얻은 전훈(戰訓)을 통해 수륙양면작전을 위한 상륙군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949년 4월 15일 해군장병 380명으로 경상남도 진해(덕산비행장)에서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한편, 해군장병의 모금운동으로 모인 성금으로 미국에서 전투함 PC-701함(백두산호)을 구입해 1950년 4월 10일 실전에 배치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함정세력은 전투함 1척, 소해정 26척, 수송함 2척, 기타 4척으로 총 33척이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 한국전쟁의 교훈으로 더욱 더 전력증강에 심혈을 기울여 구잠함과 소해정이 주축을 이루던 함정시대를 탈피하고, 경비함·고속경비함시대를 거쳐 1963년 대망의 구축함시대의 장을 열었다. 특히 1967년 1월 19일에는 동해 휴전선 근해에서 아군 ‘당포함(해군 56함, 650톤 급)이 명태잡이 어선의 어로보호작전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의 해안동굴 포대 및 육상 포대의 공격을 받고 교전하다가 침몰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승무원 79명 중 전사 39명, 중경상 14명이라는 피해가 발생했다.
1972년에는 국산고속정시대를 열어 항만방어능력을 보강하면서 해군력을 성장시켰다. 그리고 1965∼1973년까지 8년 간 베트남에 함정을 파병했다. 한편, 1973년 10월 10일 해병대가 해군에 통합되었다가 1987년 11월 1일 재창설됨으로써 각각 고유한 업무와 기능을 전문적으로 확보하게 되었다.
그 동안 꾸준히 해상전력 증강을 추진해온 해군은 외래함정이 해군력의 주축을 이루던 시대에서 점진적으로 탈피해 국산전투함과 국산고속정을 주축으로 해상전력을 재편하고 현대전의 필수요체인 항공부대를 발전시켰으며, 현대무기의 총아인 유도탄을 보유하게 되었다.
아울러 합리적인 군조직의 개편, 전술교리의 연구개발, 군수관리 기능의 개선, 교육의 혁신 등을 통해 유사시에 어떠한 도발에도 대응할 수 있는 해상방위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한미연합훈련·해상기동훈련·상륙작전훈련 등 해군이 필요로 하는 훈련에 심혈을 기울여 항상 고도의 전비태세를 유지하게 되었다.
초창기에 보잘 것 없는 몇 척의 소형함정으로 출발한 해군은 그 동안 부단한 성장을 이룩해 이제는 구축함, 잠수함 등 현대화된 해상전력, 그리고 항공작전을 수행하는 항공부대 등을 보유함으로써 명실공히 해·육·공군의 입체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막강한 해군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1993년 6월 18일 해군본부가 계룡대로 이전해 육군·공군과 함께 3군이 통합해 주둔함으로써 각 군사이의 연계가 보다 원활해지게 되었다.
해군의 교육이념은 이순신의 호국사상에 바탕을 두고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정예 장병을 육성하는 데 있다. 교육목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국 해양수호를 위한 군인정신을 기른다. 둘째, 현대전의 과학화에 부응하기 위해 새로운 군사지식을 습득하고 창조적인 군사기술을 연구, 개발한다. 셋째, 어떠한 상황에서도 싸워 이길 수 있는 강인한 체력과 실전적인 전술·전기를 연마한다. 따라서, 이러한 교육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교육체계는 크게 학교·부대·기술교육으로 구분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교교육은 양성교육과 위탁교육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양성교육은 소정의 절차를 거쳐 해군에 입대한 민간인을 군인 신분으로 전환시켜 해군장교 및 사병으로 복무하는 데 필요한 군사교육과 병과별 필수기본교육을 실시해 투철한 군인정신, 강인한 체력 및 불굴의 투지력을 부여하는 데 목표를 군 교육이다.
장교는 사관학교·기초군사학교 및 학군단에서 초급장교가 갖추어야 할 일반학교육과 군사학 교육을 이수하고, 임관 후 실무에 배치된 병과장교(兵科將校)는 병과별 기본 필수교육인 초군반 과정을 실시한다. 사병은 입대 후 6주 간의 기초군사훈련 교육을 실시한 뒤 실무에 필요한 기본지식과 직무수행능력을 부여하는 병과별 직별교육인 보통과 과정을 이수하도록 한다.
그리고 개인능력의 계속적인 발전과 계급·직책에 상응하는 기본·특기능력 및 창의적인 사고, 숙달된 전문기술을 갖춘 우수한 기량의 분야별 전문 전투요원 확보와 유지를 위한 교육과정이 있다. 장교는 중위·대위 때 초급지휘관 및 전대급 참모로서 직무수행에 필요한 지식 및 관리능력 부여를 위한 병과별 고등군사반 과정을 이수하고, 소령·중령 때 해박한 군사지식과 군사전문가를 육성하는 해군장교의 최고 교육과정인 해군대학을 이수한다.
또한, 하사관을 위해 해당직별의 관리·정비능력, 직별장 임무수행 능력을 부여하기 위한 전문교육으로 직별별로 고등과 과정이 있다.
한편 위탁교육은 고급 전문인력 확보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필요한 분야 중 교육기관이 없거나 교육투자에 비효과적인 분야를 민간, 타군 및 기타 국내외 교육기관에 위탁해 교육시키며, 군의 고급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이다.
부대교육: 각 과정별 학교교육을 이수하고 실무에 배속된 장병들에게 각 부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부대 특성에 알맞는 부대별 교육으로 전투기량의 극대화에 중점을 두고 실시하고 있다.
기술교육: 장병에게 실시하는 일인일기 교육으로 국가공인기술자격을 취득시켜 군의 기술전력을 강화하고 전역 후 국가산업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능인력 양성에도 기여하고 있다.
해군훈련을 크게 구분하면, 한미 간에 이루어지는 한미연합훈련, 육해공군 등의 삼군 간에 이루어지는 합동훈련, 해군의 특수성을 고려한 해군 단독훈련 등이 있다. 이를 성분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상륙작전훈련: 해군훈련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총체적인 훈련으로, 상륙군이 함정 및 항공기의 화력지원 하에 가상의 해안에 해상 및 수직상륙 돌격을 감행해 해안두보(海岸頭堡)를 확보하며 상륙하는 지상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훈련으로, 함정·항공기·해병부대가 동시에 참가해 상륙돌격·상륙기습·해안침투·공중기동훈련 등을 실시한다.
해상사격훈련: 해상에서 함정유형별·구경별·탄종별 구분에 따라 해상 이동 및 고정표적, 항공기에 의한 대공표적을 이용해 실시하는 함정사격훈련으로, 야간 및 저시정(低視程: 육안으로 목표를 분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 상황에서도 명중률을 높이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대잠훈련(對潛訓練): 북한 해군세력 중 그 위협도가 높은 잠수함 세력에 대한 위협을 사전에 예방하고 일단 유사시 초전에 이를 격퇴하기 위해 잠수함 탐색 및 공격훈련을 실시, 적의 잠수함에 대한 방어 및 공격능력을 향상시키는 훈련이다.
기뢰전훈련: 이 훈련은 소해함·소해항공기·기뢰부설함·수중파괴요원이 동시에 참가해 기뢰부설훈련 및 소해훈련 등을 실시, 기뢰부설 및 소해능력을 향상시키며, 전시에 항만사용의 원활을 기하게 함은 물론 유사시 적의 주요항만 봉쇄작전능력 향상을 목표로 실시하고 있다.
해상대간첩작전훈련: 북한의 해상침투를 저지하기 위해 함정이 항공기의 지원을 받으며 북한간첩선의 예상침투해역 및 침투양상을 고려해 실시하는 해상훈련이다.
구조전훈련: 불의의 사고에 대한 구조를 하기 위해 구조함정과 해난구조요원이 참가하는 훈련으로, 침몰선인양훈련·대양예인훈련·수중폭파훈련·함정소화훈련·좌초선이초훈련 등이 있다.
특수전훈련: 비정규전 하에서 특수임무 수행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특수전 요원과 구조함정이 참가하는 훈련으로, 공중고무보트낙하훈련, 전투폭파훈련, 전투기동훈련, 수중은밀침투에 의한 자석폭탄훈련, 그리고 잠수함훈련 등이 있다.
순항훈련: 해군사관학교 생도의 4년간 학업과정의 총결산으로 평소 교실에서 배운 지식을 함상에서 실습을 통해 익히는 한편, 우방을 순방해 견문을 넓히고 대한민국의 국위선양에도 크게 공헌하고 있다.
이 훈련은 1954년 해군사관학교 제9기생부터 시작해 1974년까지 동남아시아의 대만·베트남·필리핀·싱가포르·말레이시아·홍콩과 오세아니아주의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을 순방했으나, 1975년부터는 중동 및 미주지역으로도 순항항로를 개척해 인도네시아·인도·이란·사우디아라비아·오만·미국·캐나다 등지로 확대했으며, 1977년에는 아프리카의 케냐까지 확대했다.
이 순항훈련중 생도들은 항해술·기동전술·대잠전·포술·기관운전 등 교실에서 습득한 지식을 실제로 응용하고 숙달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며, 한편으로는 작전장교·포술장교·항해사·기관장교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한다. 그 밖에 순방국 해사생도들과 축구·럭비 등의 친선경기를 가지고 태권도시범·의장대시범·군악연주 등을 시범하기도 한다.
또한, 장기간의 항해 중 고통스러운 배멀미와 뜨거운 열대기후를 이겨낼 수 있는 적응력을 기르고, 적도를 지날 때는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전통적 관습인 ‘적도제(赤道祭)’를 지낸다.
생도들은 순방국 국민들과 우리 교민들에게 한국의 발전상을 소개하고 교민들에게 조국애를 북돋워 주는 등의 민간외교와 순방지역의 정부 및 군 고위지도층을 친선 예방하는 군사외교를 펼치며 국위선양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1976년 미국순방 때는 미국독립 20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해 세계 50여 국과의 의장대 시범 및 군악연주 경연에서 우승함으로써 한국 해군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낙도라 함은 글자 그대로 뭍에서 동떨어진 외딴섬이다. 한국에는 서·남해안에 약 3000여 개의 도서가 산재해 있으며, 이 중에 사람이 살고 있는 도서는 약 700여 개가 된다. 해군의 홍보활동은 특히 낙도주민들을 대상으로 섬과 육지의 일체감을 형성하고 발전하는 나라의 참모습을 전하며, 낙도주민들의 확고한 승공정신, 자립의지를 심어주기 위해 1969년부터 정부 관계기관의 협조를 얻어 해군에서 대민사업으로 매년 일정한 도서를 선정해 정기적으로 실시해왔다.
1969년 9월 5일 경상남도 진해 군항부두에서 홍보단을 발족했는데 처음 홍보선은 상륙정(LCU) 1척을 운영하다가 1971년 수송함(AKL) 1척으로 대체했고, 1975년부터는 대형상륙함(LST) 1척으로 보강해 홍보단의 활동을 강화했다.
1970년대의 홍보활동은 강연·교육·진료·상담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내용별로 보면 반공강연, 경제·새마을교육, 진료·방역활동, 가족계획계몽, 법률상담, 영화상영, 사진전시, 선물전달 및 노력봉사활동 등으로 일정이 짜여 있었다. 그 밖에 좌담회를 열어서 낙도주민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관계기관과 협조해 해결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해군본부 주관으로 1970∼1979년까지 10년 동안 매년 낙도어린이와 새마을지도자를 서울로 초청해 발전하는 한국의 활기찬 모습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특히 수술을 받으면 나을 수 있는 병임에도 불구하고 치료비를 마련할 능력이 없거나 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낙도주민들을 해군병원과 민간병원의 협조를 얻어 시술, 완치시켜줌으로써 군과 국가에 대한 신뢰를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낙도홍보활동은 낙도주민들의 생활수준이 현저히 향상되었음을 감안해 물질적인 지원보다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정신문화적인 차원에서의 낙도홍보활동이 실시되고 있다.
베트남공화국의 공산화 방지와 평정을 지원하기 위해 해군은 1965년 3월 4일 주월한국군 군사원조단에 LST 1척을 편입시켜 해상수송지원을 위한 함정을 최초로 파월시켰다. 그 뒤 1965년 7월 12일 해군 수송단대를 창설하고, 1966년 3월 15일 해군 수송분대로 중편했으며, 1967년 4월 3일에는 해군 수송전대로 확대 개편했다. 한편, 1966년 2월 15일 자유의 십자군을 상징하는 ‘백구부대’로 명명해 이후부터 해군 파월부대를 백구부대라 부르게 되었다.
파월기간 동안 해군장병은 심한 열대더위에 시달리고, 부족한 해안정보와 수로의 악조건, 베트콩의 끊임없는 공격과 위협 속에서 한국군의 타고난 용감성과 한국전에서 얻은 실전의 경험을 살려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성과를 올렸다. 사이공 항구를 모항으로 북쪽은 다낭에서, 남쪽은 푸쿠크 및 콘손에 이르는 1000여 마일 해안선에 산재한 대소 항구에 군수물자를 수송했다.
때로는 타국군이 두려워하는 베트콩의 요충지대를 돌파해 완벽한 수송작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파월기간 우리 해군함정의 군수물자 수송실적은 462회 63만 3728마일, 56만 2011M/T에 달한다.
한편 “100명의 적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양민을 보호한다.”는 기본정신으로 사이공의 난민과 기항지의 난민, 어민 및 군인가족들에게 생필품을 전달하고 대민진료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LST 3척과 LSM 2척으로 편성되어 1973년 4월 3일 개선 귀국할 때까지 해상수송을 지원한 백구부대의 총 함정척수는 LST 34척, LSM 26척이었다.
한반도는 중·소의 대륙세력과 미·일의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동북아의 국제분쟁지역이다.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 가속화, 중국의 부상(浮上), 일본의 경제대국화 및 군사역할 증대와 같은 주변국들의 위협은 주로 해양을 통해 압박을 가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전략적 환경에서 자력으로 해양을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곧 국가의 존망과 민족의 생존을 위한 지상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전세를 역전시키고 반격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해군만이 수행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해군은 초창기에 아무 것도 없는 악조건 속에서 “삼가 이 몸을 조국에 바치나이다.”라는 비장한 결의와 각오 아래 각고의 노력으로 지금의 해군으로 성장, 발전했다. 그러나 조국의 통일이 미해결의 숙제로 남아 있는 오늘의 현실은 해군의 사명이 더욱 막중함을 절감하게 한다. 따라서 한국의 해양환경에서 해군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자위능력을 확보해 북한의 도발의도를 사전에 저지하고, 지속적으로 자주적인 해군력을 신장,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해상통제권의 확보, 해상교통로의 보호와 해양으로부터의 군사력투사 등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요소가 되므로 이에 부응할 수 있는 현대화된 해군력을 유지·육성·발전시켜야 한다. 해군력이 막강해질 때 한국은 확고한 해역방어 의지를 표명할 수 있으며, 주변 이해관계국들의 대한정책 결정과 수행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국가를 방위하고 해양에서의 국익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