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악대는 1895년부터 1907년까지 군영에서 음악을 연주한 악대이다. 먼저 전통 취타를 연주하던 내취군악대가 있었고 이후 서양식 악기를 쓰는 양악군악대가 만들어졌다. 양악군악대가 생기기 전에는 나팔을 부는 곡호수, 나팔과 북으로 구성된 곡호대가 활동했다. 1900년 정식으로 양악군악대가 조직되며 서양식 편성으로 운영되었고, 독일인 에케르트 등이 훈련을 지도했다. 그러나 1907년 군대 해산으로 군악대가 폐지되었고, 해방 이후 다시 육군·해군·공군 군악대가 창설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군악대(軍樂隊)는 개항기와 대한제국기 군영에 설치된 악대로서, 내취군악대와 양악군악대의 두 종류가 있었다. 그리고 양악군악대가 성립되는 과정에 군영에서는 동호수(銅號手) · 곡호수(曲號手) · 나팔수 등의 연주자와 곡호대(曲號隊)가 활동하는 기간이 있었다.
최초의 군악대는 내취군악대이다. 내취군악대는 취타내취(吹打內吹)로 구성된 군악대였다. 취타내취는 선전관청(宣傳官廳)에 속해 있었으며, 1895년(고종 32) 선전관청이 철폐된 후 시종원(侍從院)으로 이속되었고, 1900년(광무 4) 우시어청(右侍御廳)이 설치되자 우시어청으로 그 소속을 옮겼다. 우시어청은 1907년에 폐지되었고, 취타내취는 1908년 궁내부 장악부로 이속되어, 그 소속과 성격이 군영악대에서 궁중악대로 바뀌었다. 궁중악대로서의 취타내취에 대한 기록은 1915년부터 보이지 않는다.
1894년 12월 제2차 개혁 내각 군무국은 훈련대(訓鍊隊) · 주1 · 시위대(侍衛隊) · 주2를 신설했다. 시위대는 신설대 소속 공병 병력에서 2개 대대를 차출하여 시위 2개 대대로 편성하였다. 이들은 양번제로 3일씩 교대로 궁궐 시위임무를 수행했다.
1895년 종래의 취타내취를 개편한 내취군악대가 시위대에 설치되었다. 내취군악대는 각 38명으로 구성된 두 개의 패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취군악대는 최초의 군악대이지만, 그 연주자가 취타내취이고, 악기 편성이 취타악기이기 때문에 취타내취와 변별되지 않는다. 시위대는 1895년 8월 22일에 훈련대로 편입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1900년 양악군악대가 설치된 후 시종원 소속 취타내취 혹은 내취군악대를 구군악대(舊軍樂隊)라고도 했다. 구군악대라는 용어는 1905년 시종원에 보내는 「조회 시종원경 민영휘 제1호(照會 侍從院卿 閔泳徽 第一號)」라는 문서에 처음 보이며, 여기에 구군악대라는 명칭과 더불어, 옆에 ‘대취타(大吹打)’를 부기해 놓았다. 구군악대라는 용어는 양악군악대가 설치되기 전에 있었던 옛날의 군악대라는 의미이며, ‘대취타’를 연주하는 점과 시종원 소속이라는 점, 그리고 군악대라는 용어로 미루어 시종원 소속 취타내취 혹은 내취군악대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양악군악대가 설치되는 초기 단계에 군영에서 동호(銅號), 나팔, 북과 같은 악기를 도입하여 사용하는 과정이 있었다. 동호는 1882년 9월에 설치된 청국식 근대 조선군 체제인 친군우영(親軍右營)에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호는 당시 청나라 주3에 편성된 것으로, 양악기가 아닌 전통악기이지만, 이 동호를 서양 나발로 추정하기도 한다. 나팔은 동호 혹은 곡호(曲號)로 지칭했고, 나팔 연주자는 곡호수라고 했다.
1883년 경기도 광주유수 겸 수어사였던 박영효(朴泳孝: 1861~1939)는 독자적으로 병력을 양성했는데, 이 부대에서 이은돌(李殷乭)이 나팔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은돌은 1881년 11월 일본의 교도단 긴본 군악대에 유학하여 프랑스 악대 지도자 다그롱(Gustave Charles Dagron)으로부터 주4과 신호나팔, 악대 교육, 군사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882년 10월 22일에 귀국하여 1883년 4월 경기도 광주유수로 좌천된 박영효한테 가서 육군도야마학교[陸軍戶山學校] 출신인 신복모(申福模)와 함께 그곳의 광주병대 8백여 명의 군사를 훈련하고 나팔수를 양성하였다.
1883년 4월 11일에는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나팔 20개를 들여왔고, 12일에는 본영에서 사용할 나팔 4쌍을 일본에서 들여왔다. 이때 나팔을 들여온 사람은 민(閔)씨 성의 병조판서와 해연도총제사(海沿都總制使) 민응식(閔應植: 1844~?)이다. 즉 나팔은 늦어도 1883년 무렵부터 사용했고, 그 도입처는 일본이며, 공식적 과정을 거쳐 도입되었다고 하겠다.
나팔이 도입된 이후 양악군악대 성립 이전에 곡호대라는 악대가 성립되었다. 곡호대는 나팔 연주자인 곡호수와 북 연주자인 고수, 그리고 행정직인 부교(副校)로 구성되어 있었다. 1888년 이후 장위영(壯衛營) · 친군별영 · 경리청(經理廳) 등에 곡호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구성이 체계적이지 않지만, 주5과 같은 직책이 보이는 것이 공통된다.
1894년 이전 시기의 초기 단계 곡호대는 경리청 · 친군별영 · 장위영 등에 편제되어 있었고, 십장과 같은 우두머리의 명칭은 보이지만, 구성원의 종류나 숫자에 관한 규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곡호대가 체계화되는 시기에는 중앙은 21명 단위 곡호대, 지방은 9명 단위 곡호대를 거쳐 21명 단위 곡호대가 설치되었다. 이 곡호대는 곡호수와 고수 그리고 부교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전국 군영에 모두 편제되어 있었다.
1896년(건양 원년) 10월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유럽을 시찰하고 돌아온 후 군악대를 설치하기를 주청했다. 이에따라 1900년(광무 4)에 군악대 설치령이 내려졌고, 1900년에 양악군악대 설치를 공포했다. 1900년 12월 19일에 양악군악대를 두 개의 대로 편성하여 각각 시위보병연대와 시위기병대대에 배속했다.
1900년의 양악군악대의 편제는 대장[1등 군악장] 1, 부장[2등 군악장] 1, 1등 군악수[부참교] 3, 2등 군악수[상등병] 6, 악수(樂手)[병졸] 27, 악공(樂工)[병졸] 12, 서기(書記)[참교] 1로 되어 있으며, 모두 5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04년에 시위보병연대와 시위기병대대에 각각 운용되던 군악대를 폐지하고, 2개 소대를 1개 중대로 하여 군악중대를 증편했다. 1개 중대는 중대장[1등 군악장] 1, 소대장[2·3등 군악장] 2, 소대장[정교] 1, 1등 군악수[부참교] 8, 2등 군악수[상등병] 12, 악수(樂手)[병졸] 54, 악공(樂工)[병졸] 24, 서기[부참교] 2의 104명으로 편제되어 있다.
양악군악대에서 사용한 악기는 대적(大笛)[flute], 소적(小笛)[piccolo], 호적(胡笛)[oboe], 최고음생(最高音笙)[Eb clarinet], 중음생(中音笙)[Bb clarinet], 심음생(深音笙)[bass clarinet], 최고음나팔(最高音喇叺)[Eb piston], 보음나팔(保音 喇叺)[saxhorn], 최강음나팔(最强音喇叺)[alto trombone], 강음 나팔(强音喇叺)[tenor trombone], 조심음나팔(助深音喇叺)[baritone saxophone], 반심음나팔(半深音喇叺)[bass trombone], 심음나팔(深音喇)[bass saxophone], 최저음나팔(最低音喇叺)[bass tuba], 삼각경(三角磬)[triangle], 철금(鐵琴)[glockenspiel], 소고(小鼓)[s. drum], 대고(大鼓)[drum], 등고(藤鼓)[tambourine], 전조편(轉調片), 정음기(正音器)[tuning fork], 제금(提琴)[cymbal], 악보대(樂譜臺)[보면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중 조전편, 정음기, 악보대는 악기가 아니지만, 연주에 필요한 도구이므로 함께 포함해서 기록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양악군악대가 사용한 악기의 도입과 관련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도 레이조(掘本禮造: 주6가 일본에서 나팔과 북을 가져왔다고 보는 설도 있고, 1897년에 러시아로부터 구입했다는 기록도 주7
군악대 조직의 설계는 당시 궁내부 고문관으로 있던 미국인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William Franklin Sands)[이칭 산도(山島)]와 총세무사(總稅務司)로 있던 영국인 브라운(Brown)[이칭 박탁안(柏卓安)]이 담당했다. 군악대를 훈련하여 연주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사람은 독일인 에케르트(Franz von Eckert: 1852~1916)였으며, 군악대에서 연주한 악곡은 각종 애국가, 행진곡, 가곡, 무도곡, 주8 등이었다.
양악군악대 제도는 1907년 군대 해산과 함께 폐지되었고, 연주자들은 궁중의 의식과로 이속되었다. 궁중 소속 양악대는 1910년 한일병합과 1916년 에케르트의 사망으로 해산되었다. 이왕직 양악대는 이후 경성악대라는 이름의 민간 자영단체가 되어 계속 명맥을 이어갔지만, 1930년대까지 겨우 명맥을 이어오다가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 악기의 일부는 휘문학교에 기증하고 일부는 이왕실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해방이 되자 서울시 경찰악대에 기증했다.
1945년 11월 해안과 국토 수호를 목적으로 해방병단(海防兵團)이 조직되었고, 1946년 1월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조직되었다. 이들 조직은 미군정청 국방부 해안경비대와 조선경비대로 개칭되었다가 1948년 건국 후 국방부 산하 육군과 해군으로 정착했다. 군악대는 1946년 3월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연대에 가장 먼저 창설되었고, 이후 4년간 11개의 군악대가 창설되었다. 각 연대와 여단 군악대는 군 편제의 개편에 따라 사단 군악대로 소속이 변경되면서 명칭이 바뀌기도 했으며, 이 밖에 수도경비사령부, 육군본부군악대, 주9 등을 별도로 조직했다.
1949년 5월 1일 육군군악학교가 설립되었다. 해안경비대에서는 관악대를 조직하여 운영하던 중, 1946년 11월 해안경비대가 진해로 옮겨간 것과 함께 해안경비대 악대를 조직했으며, 1947년 해군군악대를 창설했다. 1949년 4월 22일 해군군악학교가 설립되었고, 1951년 진해에서 해병교육단이 창설되면서 해병대군악대가 설립되었다.
1973년 해병대가 해군본부와 통합되면서 해병대군악대가 해산되었다가 1989년 해병대의 독립과 함께 군악대도 독립했다. 공군에서는 1951년 10월 17일 군악대 창설 일반명령에 따라 공군 제106기지전대 군악대를 창설했다. 공군군악대는 사후 승인되어 1952년 8월 1일 공군본부군악대로 공식화되었다.
육군군악대의 설립과 운영에 관여한 사람은 김계원(金桂元: 19232016), 김판기(金判基), 황기오이며, 해군군악대의 설립과 운영에 관여한 사람은 김석창, 한상기, 남궁요열(南宮堯悅: 19122002), 정호상(鄭乎相), 현종건, 김석호, 김성태, 백문기이다. 이 외에 미국 고문관 브라운 대위는 제1여단 군악대가 정규 군악대로 편성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군악대의 한 종류인 국악대는 현재 세 곳이 설치되어 있다. 1968년에 육군 국악대가 창설되었고, 1989년 7월 1일 국방부 국악대가 창설되었으며, 2016년 해군교육사령부에 국악대가 창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