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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서양식 악기 편성에 의해 설치된 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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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서양식 악기 편성에 의해 설치된 악대.
내용

우리나라에서는 1900년(광무 4)에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시위대(侍衛隊)에 부속되었기 때문에 시위대군악대라고도 불렸다. 대장 1인, 부장 1인, 1등 군악수 3인, 2등 군악수 6인, 악수(樂手) 27인, 악공 12인, 서기 1인 도합 51인으로 발족하였다. 대장은 지금의 대위 혹은 중위 계급에 해당하였고, 부장은 상사, 1등 군악수는 하사, 2등 군악수는 상등병, 악수와 악공은 이등병, 서기는 중사에 해당하였다.

조선 말기 문호가 개방되면서 구미 각국의 통상사절과 군대가 들어오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40∼50명으로 조직된 군악대가 장엄한 행진곡을 연주하면서 서울거리를 누비며 시선을 끌었다. 그 뒤 당시의 육군 부장(副將)이던 민영환(閔泳煥)은 1896년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여 그곳 군악대의 위용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귀국하여 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이의 창설을 주청하였고, 그 주청이 받아들여져 창설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당시 군악대의 음악 지도자는 1901년 2월에 독일 프러시아의 왕실악장을 역임한 에케르트(Eckert, F.)가 초빙되어 맡았다. 에케르트는 오보에와 음악이론에 정통하였고, 일본의 군악대와 아악과(雅樂課)의 양악 육성에 힘쓴 사람이었다. 이때의 한국인 군악대장으로는 백우용(白禹鏞)이 임명되었는데,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지휘봉을 든 사람이었다. 악기는 대적(大笛, flute)·소적(小笛, piccolo)·호적(胡笛, oboe) 등 21종의 관악기와 타악기로 편성되었다.

이렇게 편성된 군악대는 에케르트에 의해 훈련된 지 겨우 6개월 만인 1901년 9월 9일(고종의 탄신일)에 첫 공연을 가졌는데, 당시 서울 거주 외국인들의 찬탄을 자아내었다. 이후 왕가의 여러 의식과 행사에서 음악을 맡아 연주하였고,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에는 지금의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정기적으로 시민위안 음악회를 갖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02년 프랑스함 프리앙트호가 왔을 때는 교환연주를 하였고, 독일 제6함대 군악대와 파고다공원에서 경연을 할 만큼 기량이 향상되었다.

1904년 무렵에는 구미 각국의 음악을 마음대로 다룰 정도의 수준까지 이르렀다. 지휘는 에케르트·백우용에 이어 강흥준(姜興俊)·김창희(金昌熙)·이춘근(李春根) 등이 담당하였다. 1907년(융희 1)에는 을사조약으로 인한 한국군의 해산과 더불어 군악대도 해산되면서, 11월에 양악대(洋樂隊)라는 이름으로 개편되었다. 조직도 이전 군악대장 이하의 제도가 양악사장(洋樂師長)·양악사·양악수장·양악수의 4계급으로 개정되었다.

1915년 3월에는 양악대가 완전히 해산되고,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어떤 이들은 각급 학교 운동회에 불려다니기도 하고, 조선호텔·조선극장·우미관 등의 전속악사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해산되기 전까지의 연주 곡목은 「대한애국가」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국가와 독일·영국 등 구미 각국의 춤곡과 행진곡·가곡 등이었다. 일본이나 중국의 음악은 드물었고, 유럽 여러 나라의 음악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평상시 복장은 웃옷은 검은색이었고 견장을 달았으며, 소매 끝에는 계급을 표시하는 줄이 있었다. 대례의(大禮衣)는 상의 좌우에 금줄무늬로 된 악기 모양 표지가 달려 있었고, 수장(袖章)은 평상복과 같았다. 위아래 모두 붉은 융으로 하였고, 바지에는 검은 줄을 쳤다. 모자는 붉은 융의 뚜껑에 새털을 꽂아 세웠다. 해산 당시의 대우는 양악사장이 월 50원 이하, 양악사 30원 이하, 양악수장이 15원 이하, 양악수가 10원 이하로 당시의 쌀 한 가마가 6원이었다고 하니 좋은 대우는 아니었다.

그러나 새로운 이 서양식 군악대는 한국 최초로 서양 음악을 연주하였고, 많은 한국인 연주가를 배출했으며, 군악은 물론 일반 서양음악을 보급하는 데 커다란 구실을 담당하였다.

광복 후 육·해·공군 및 해병대가 창설되면서 각 군의 군악대도 속속 창단되었다. 1945년 현 육군사관학교 자리에 육군 제1연대가 창설되면서 미 고문관인 대위 브라운의 협조로 창설되었다. 이것이 육군본부군악대의 모체였고, 초대 군악대장은 참위 김계원(金桂元)이었다.

정부 수립 후 점차 정비를 하여 본격적인 규모를 갖추게 되었고, 전쟁중에는 북한의 각 수복 도시를 돌며 승리의 노래를 연주하였다. 또한 1951년 5월 교향악단을 조직하여 유엔군장병위문 연주를 하여 이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1949년에는 제2대 군악대장인 소령 김판기(金判基)에 의해 육군군악학교가 설립되어 군악병의 음악이론과 실기 향상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이후 각 사단급의 예하부대마다 군악대가 조직되었다.

1957년 7월에는 동남아시아 각국에 파견된 한국예술단의 일원으로 군악대의 일부가 참가하였고, 각 예하부대 군악대의 대민 연주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67년에는 월남 주둔 한국군에도 군악대가 창설되었고, 1968년에는 육군참모총장 김계원의 명에 의해 50명으로 구성된 육군국악대가 창설되었다. 육군국악대는 전국에 하나밖에 없는 명물로 군악은 물론, 국악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한편, 교향악단은 1956년 6월 해산되기까지 크고 작은 50여 회의 연주를 통하여 그 기량을 인정받았으며, 그 뒤에 KBS관현악단(管絃樂團)의 모체가 되어 한국 교향악운동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지금까지의 육군군악운동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본부 군악대 제8대 대장인 중령 김희조(金熙祚)로 많은 행진곡과 군가를 남겼으며, 군악대의 질적 향상을 도모한 업적은 기억될 만하다.

1983년 이후부터는 매년 군악 정기연주회를 개최하고 있다. 본부 군악대의 대장은 초대 이후 1986년 당시 16대에 이르고 있으며, 육군본부 외에도 사관학교와 각 사단급 부대에까지 조직되어 있다. 본부군악대는 서울 동작동에 위치하고 있다.

1946년 초서울에서 민간인에 의해 20명으로 조직된 해방단이 모체가 되어 같은 해 가을 진해 해안경비대에서 민간인 16명으로 조직되었다. 초대 대장은 대위 김석창(金錫昌)이었고, 이 군악대는 본부군악대의 모체가 되었다.

이후 서울에도 군악대가 조직이 되었고, 전쟁중에는 유엔군 참전병사의 영접행사에 참가하여 이들의 사기를 높였다. 전쟁중에 육군과 마찬가지로 교향악단을 창설하여 활발히 연주활동을 벌였다. 이는 해군정훈음악대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모체로 한국 교향악운동에 끼친 공은 지대하다.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부산시립교향악단 창단의 주역이 되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서울 회현동에서 제2대 대장인 중령 남궁 요열(南宮堯悅)에 의해 음악대학 과정과 비슷한 2년제의 음악학교가 설립되고, 1961년에 음악교육대로 개편되었다. 본부군악대는 사관학교 원양 실습에 참가하여 세계 각국을 순항하면서 군악활동을 벌이며 국위 선양에 힘쓰고 있다. 특히 1983년에는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건국 200주년기념 각국 군악대와 의장대시범대회에 참가하여 참가 56개국 90여 단체 중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1956년부터는 초·중·고·대학을 순회하며 연주하여 국방사상과 정서 함양에 이바지하고 있다. 또한 매년 무의(無醫) 섬을 방문하여 대민위안 연주를 실시하고 있으며, 이순신장군탄신기념연주·주요 도시 순회연주 등을 실시하고 있다. 한편, 군악대원 가운데 우수한 자질을 가진 자를 선발하여 미국 워싱턴의 미 해군군악학교에 1년간 유학을 보내 우수한 음악인 배출의 요람이 되고 있기도 하다.

해군군악대 운동에 공을 세운 사람으로는 제5대 대장인 소령 이교숙(李敎淑)이 있으며, 제6대 대장인 소령 도정삼(都鼎三)은 많은 행진곡 작곡과 음악의 질적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해군은 서울의 해군본부와 진해사령부·인천기지에 군악대를 두고 있으며, 본부군악대의 대장은 초대 이후 1986년 당시 7대에 이르고 있다. 본부군악대는 서울 대방동의 해군본부 안에 있다.

1951년 6월 대구의 공군 제106기지 전대에서 44명의 대원으로 창설되었고, 초대 대장은 소령 정호상(鄭乎相)이었다. 이것은 공군본부 군악대의 모체가 되었다. 창설 이후, 각 기지 순회연주와 대민위안 연주를 활발히 가졌고, 1986년 당시까지 1천여 회의 연주활동을 가졌다. 군악 발전에 공이 큰 이는 중령 최문호(崔文鎬)로, 초창기 조직에 도움을 주었다.

본부 군악대 이외에 군수사군악대와 사관학교 군악대를 가지고 있으며, 본부군악대의 대장은 초대 이후 1986년 당시 3대에 이르고 있다. 본부군악대는 서울 대방동의 공군본부 안에 있다.

1950년 10월 진해 해병대 교육단에서 해군군악대에서 차출된 20명의 대원으로 창단하였고, 초대 대장은 준위 이관승(李寬昇)이었다. 이후 ‘귀신잡는 해병’에 군인정신을 불어넣는 활발한 연주활동을 벌였다. 초대 대장 이후 1973년까지 4대에 이르렀으나 해병대사령부가 해군과 합쳐짐으로써 같은 해 해군군악대에 편입되었다.

군악대의 임무는 군의 각종 의식과 국가원수를 위한 의식, 외국 국가원수 예방시의 의식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군악을 통하여 백절불굴의 군인정신과 애국심을 함양시키는 데 그 사명이 있다. 평화시에는 군인의 기본 자세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며 전시에는 죽음을 불사하는 용맹심을 배양하는 데 기여하여 국가를 수호하고 국민의 안녕을 위한 봉사정신을 고취하는 데 그 최종 목적과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구한국관보』 제1764호(구한국의정부총무국관보과, 1900)
『육군군악사』(육군본부, 1980)
『여명의 동서음악』(장사훈, 보진재, 1974)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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