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의미에서는 육군·해군에 속하는 항공기를 제외한 항공기로 항공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시설과 장비로 편성된 모든 군대를 말하기도 한다.
공군은 공중 공간의 매개체를 통하여 항공무기 체계를 수직 및 수평적으로 무한히 이동할 수 있다는 특성을 가진다. 이러한 공군력 고유의 특성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속도
공중 공간에서 전력의 신속한 이동으로 짧은 시간 안에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특성,
(2) 거리
지리상의 장애를 받지 않고 장거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특성.
(3) 고도
타군이 도달할 수 없는 고도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특성.
(4) 융통성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대처할 수 있는 포괄적인 특성.
이상과 같은 특성을 가진 공군은 공중 공간의 환경을 매개체로 하여 발휘할 수 있는 전투 잠재력을 제공해 준다. 그 세부 능력은 다음과 같다.
(1) 감시성
공중 공간 매개체를 통하여 전시·평시를 막론하고 적의 활동을 감시할 수 있는 특유한 능력으로서, 적의 활동에 대한 적시적이고 신뢰성 있는 정보는 전력의 동원·분산·발사·관제를 위한 의사결정에 확고한 기준을 제공해 준다. 레이다나 유인·무인 감시장치는 공군의 지원에 중요한 부분을 형성한다.
(2) 신속대응성
적의 도발에 다양하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며, 적대행위가 시작된 초기단계부터 분쟁의 범위를 억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비상대기 태세의 강화, 전력의 이동배치, 무력시위 등을 통하여 적에게 우리측의 의지를 표명할 수 있다.
(3) 이동성
항상 변화하는 전황에 따라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투력을 가장 필요한 곳에 이동시켜 재배치함을 의미한다. 공군은 어떠한 지역에서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연적인 경계를 넘어 항공무기체계를 이동할 수 있으며, 고성능 기동무기와 지원체제를 운용함으로써, 이동능력을 확대시킬 수 있다.
(4) 침투성
적지의 어떤 지역에서도 다양한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기습적으로 적의 방어망을 침투할 수 있는 능력이다.
(5) 파괴성
짧은 시간 안에 막대한 화력을 집중시켜 적의 군사력을 선택적이고 광범위하게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다.
(6) 생존성
속도·고도 및 거리를 결합한 기동성과 융통성 등, 공군력 고유의 특성을 이용하여 적의 공격에 피해를 받지 않고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
방어적 대응책과 무기체계 구성의 중복장치 등은 공군력의 생존성을 높인다. 또한, 조기경보와 신속한 대응발사 역시 항공무기체계의 생존성을 높이는 것이며, 공격에 대한 적극방어와 은폐·위장·분산 등에 의해서도 생존성을 높인다.
한국 공군은 국가방위의 핵심전력으로 영공을 방위하며, 제공권을 확보하여 아군의 군사력 및 국가의 주요시설을 보호하는 한편, 적의 전력원(戰力源) 분쇄를 목적으로 하는 제공작전(制空作戰)·근접항공지원작전(近接航空支援作戰)·전장항공차단작전(戰場航空遮斷作戰)·항공후방차단작전·감시 및 정찰작전·공수작전·탐색 및 구조작전·특수작전 등을 수행한다.
그 밖에도 대민 지원, 항공교통 관제, 과학기술 인력의 양성 및 배출 임무를 수행한다. 이들 임무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하여 요원을 교육·훈련시키는 한편, 무기체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1) 초기 항공인들의 활동
1945년 11월 13일 미 군정청 내에 국방사령부가 설치되고, 곧이어 남조선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가 창설되었다. 이와 같은 준군사조직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공군은 아직 창설되지 않고 있어서 국내외 항공계 종사 인사들은 몇 개의 항공관계조직체를 창설하여 후일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1946년 3월 20일 군 출신 항공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항공기술연맹을 창설하고 명예위원장에 신익희(申翼熙), 위원장에 신치호(辛致浩), 부위원장에 함병선(咸炳善)이 취임하여 처음으로 기성 항공인 단체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 단체들은 항공인들의 규합과 항공사상의 보급을 위하여 상호 관계를 유지해 오던 중, 그 해 7월 26일 윤창현(尹昌鉉) 외 여러 명이 재중국 항공인 환국 환영대회를 개최하고, 중국에서 돌아온 최용덕(崔用德)·이영무(李英茂)·김진일(金震一) 등 여러 항공인들과 국내에 있던 항공인들이 뜻을 같이하여 항공인의 단합을 위한 항공단체 통합준비위원회 결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그 해 8월 10일, 많은 항공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국항공건설협회를 창립, 회장에 최용덕, 부회장에 이영무를 선임하고 항공사상의 보급과 장차 국방의 일익을 담당할 공군 창설을 위하여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 협회는 그 해 10월 25일, 건국공업박람회장에 항공관을 개설하였으며, 12월 5일 여류항공인 이정희(李貞喜)가 춘천에서 여러 학교를 순방하며 강연하였다.
1946년 5월 동남아시아지역에서 귀국한 일본군 항공대 전대장을 지낸 김정렬(金貞烈:일군항공대위)은 당시 통위부 정보국장 대리로 근무하던 그의 동생 김영환(金英煥)을 통하여 미군정청과 자주 접촉을 하면서 항공부대 창설여부를 알아보았다.
그 결과 가능성이 보이자, 한국항공건설협회 간부와 항공계 지도급 인사 최용덕·이영무·박범집(朴範集)·장덕창(張德昌)·이근석(李根晳)·김영환 등과 의논, 공군 창설을 관계요로에 건의하기로 하고, 우선 광범위하게 항공계인사들을 규합하였다.
(2) 7인 간부 임관
공군 창설을 추진해 오던 항공계 지도자들은 먼저 통위부장 유동열(柳東說)과 교섭하는 한편, 통위부 정보국장 대리직에 있던 김영환은 조선경비대 미 고문관 프라이스(대령)와 구체적으로 교섭하였다. 1948년 3월 미군정 당국은 앞으로 조선경비대에 경비행기부대를 창설한다는 전제 아래, 항공계 지도급 인사들이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 미식 훈련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하였다.
이에 과거의 경력이 장성·영관 또는 위관 등의 장교들인데 일개 이등병으로 훈련을 받으라는 것은 불가하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으나, 항공계의 최고령자인 최용덕은 간부들의 흥분과 반발을 무마하고 입교하도록 설득, 결국 이들은 1948년 4월 1일 수색에 있는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하였다.
1개월간의 도수훈련(徒手訓鍊)을 비롯, 집총훈련, 미 군편성 및 전사(戰史) 등을 교육받은 뒤, 5월 1일 태릉에 있는 경비사관학교에 입교, 2주간의 장교후보생 교육을 받은 다음 5월 14일부로 소위로 임관, 항공인들의 구심점이 되기 시작하였다.
(3) 항공부대의 창설
1948년 5월 15일 경기도 수색에서 통위부 직할부대로서 항공부대가 창설되었다. 창설과 동시에 초대 사령관에 소령 백인엽(白仁燁)이 임명되었다. 그 해 6월 조선경비대로 예속이 변경되었고 7월 9일 초대 사령관이었던 백인엽이 제4여단으로 전출, 후임에 7인 간부의 한 사람인 중위 최용덕이 임명되었다.
한편, 조선경비대 장교로 임관하여 복무중에 있던 소위 박원석(朴元錫)과 소위 장지량(張志良)을 항공부대로 전입시키고, 항공계 출신 하사관의 전입을 받으면서 항공 유경험자들을 선발하여 입대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27일 명칭을 항공기지부대로 개칭하고 부대 주둔지를 수색에서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로 이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사령관인 대위 최용덕은 국방차관으로 전임되고 부사령관이었던 이영무가 사령관이 되었다. 9월 1일 송정리에서 김포비행장 내로 이동하여 처음으로 기지 근무를 시작하였고, 이로부터 김포기지가 공군의 발상지가 되었다. 김포비행장 내로 이동한 항공기지부대에서는 직무훈련이라는 명목으로 한·미 합동 근무를 하면서 비행기 획득과 미군의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데 모든 힘을 다하였다.
(4) 연락기(L형 항공기) 도입
정부 수립 후, 9월 4일 L―4형 연락기 10대를 인수하여 열흘 만에 조립작업을 완료하고, 비행부대장인 대위 김정렬이 시험비행을 하였으며, 9월 15일 태극 표지를 단 L―4기 10대가 편대를 지어 한국 역사상 최초로 서울상공을 전시비행하였다.
한편, 10월 19일에 발생한 여순사건의 진압작전에 비행부대가 참가하게 되면서 항속거리가 짧은 L―4기로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한 미군 당국에서는 정찰용 L―5형 연락기 10대를 제공하여 도합 20대의 L자형 항공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5) 육군항공군사령부 발족과 기구 개편
항공기지부대가 L―4형 항공기를 보유하게 되자 같은 해 9월 13일 항공군사령부로 명칭을 개칭하는 한편, 전반적인 기구 개편을 하였다. 12월 1일 조선경비대가 육군으로 개편됨에 따라 항공군사령부는 육군항공군사령부로 개칭되었으며, 사령부 예하에는 여의도기지에 비행부대, 김포기지에 항공기지부대를 새로 창설하고 비행대장에 대위 김정렬, 항공기지부대장에 대위 장덕창이 각각 보직되었다.
비행부대는 2개 소대로 편성하여 소위 장성환(張盛煥)과 소위 김신(金信)을 각각 소대장으로 임명하고 비행훈련을 시작하였다.
(6) 공군의 독립
항공사령부는 기구확장·병력증원·비행기확보 등을 하는 한편, 정부·정계 및 미 군사고문단을 상대로 공군 독립을 위한 막후교섭을 하면서 국민들에게 항공사상을 보급시켰다.
1948년 12월 1일 조선경비대 항공군사령부가 육군항공군사령부로 개칭되자 사령부 간부들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에게 공군의 독립을 건의하여 상당한 호응을 얻었으나, 미 군사고문단측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1949년 4월 항공군사령부는 항공사관학교장인 중령 김정렬이 저술한 『항공의 경종』이라는 책 500부를 만들어 정계 고위층과 관계요로에 배부하면서 공군의 독립과 장비현대화를 역설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49년 6월 28일 육군본부에 항공국을 설치하고, 국방부 별관 안에 사무실을 마련하였다.
또한 항공국장에 중령 박범집이 보직됨으로써 공군 독립은 진일보되었으며,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대통령의 영단으로 육군 항공군사령부는 병력 1,897명(장교 242명, 사병 1,655명)과 항공기 20대를 가지고 육군에서 분리되어 공군으로 독립하였다.
(7) 기구 및 병력
대통령령 제254호로 발표된 「공군본부직제령」에 따라 1949년 10월 1일 국방부 별관 안에 공군본부를 설치하고, 총참모장에 공군대령 김정렬이 보임되었으며, 인사·정보·작전·군수국의 4개 일반 참모부서와 고급부관실·재무감실·법무감실 등 3개 특별참모부를 두었다.
한편, 육군항공사관학교는 공군사관학교로, 비행부대는 비행단, 항공기지부대는 항공기지사령부로, 여자항공교육대는 여자항공대로 각각 개편하고 공군병원과 보급창이 신설되었다. 같은 해 12월 17일 공군본부 청사를 서울특별시 용산 소재 국방부 별관 내에서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으로 이동하고, 12월 19일 항공기지사령부는 종래 사용하던 여의도와 김포기지 외에 새로운 기지에 부대를 주둔시켰다.
당시 한국에는 제2차세계대전중에 일본군이 건설한 여의도·김포·수원·평택·대전·대구·군산·수영·김해·포항·울산·광주·진해·제주·모슬포 등의 기지가 있었다. 공군은 여러 기지 중에서 여의도와 김포기지를 사용하다가 독립이 되자, 각 기지의 재산손실을 방지하고 비상시 비행부대의 전개 등을 고려하여 수원·군산·광주·대구·제주 등 5개 기지에 기지부대를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기지부대를 전개함으로써 뒷날 6·25전쟁 발발시 UN공군이 신속하게 참전, 기지를 사용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또한, 1950년 1월 5일 육군헌병요원 28명을 전입시켜 공군헌병대를 창설하였으며, 초대 대장에 소령 김득룡이 임명되었다. 4월 1일 정훈감실을 창설, 대위 김기완(金基完)을 정훈감에 임명하였다. 공군 창설 당시의 편성은 편성표와 같다.
한편, 공군 창설을 전후해서 부족한 항공기를 구입하기 위한 국민들의 성금이 모아져 캐나다에서 AT6 항공기 10대를 구입, 1950년 5월 14일 여의도기지에서 명명식을 가지고 ‘건국기’라 칭하였다.
공군의 복장은 육군에서 독립할 당시 육군과 형태가 같았으며, 동복과 모자의 색깔만 달리하여 착용하였다. 모표와 계급장은 새로 창안하여 사용하였는데, 하나의 선과 형이 모두 공군을 상징하였다. 모표는 장교용과 사병용이 달랐으나 다같이 매[鷲]모양과 별로써 공군을 상징하였고, 장교용에는 무궁화형을 배경으로 하였다.
장교의 계급장은 위관은 태극표지에 무궁화의 잎사귀 수로 표시하였고, 영관은 역시 태극표지를 중심으로 잎과 꽃의 수로 상하를 표시했다. 사병 계급장은 격납고를 상징하는 ㅁ자형의 일등병부터 시작하여 한 계급을 올라갈 때마다 활주로의 상징인 횡선을 하나씩 늘려서 표시하였고, 일등병에서 특무상사까지 다같이 상단에 새 모양을 넣어 공군을 상징하였다.
이러한 복제에 조종·정비·통신의 주요 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요원은 흉장을 항공부대 때부터 패용하였다.
(1) 구성요소
한국공군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는 병력·항공무기체계·시설·부대구조로써, 이 네 가지 요소가 적절히 통합되어 효과적인 전력(戰力)을 발휘한다.
① 병력:공군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원이다. 병력은 현역·군무원·방위병·예비군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상호 밀접한 관계와 의존성을 가지고 부여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경주한다.
② 항공무기체계:공군의 무기체계는 항공기를 비롯한 전투장비와 요원을 중심으로 제반기능이 체계적으로 통합되어야만 전투력을 발휘하는 특성을 가진다. 공군력 행사는 분쟁 성격과 국가전략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선택이 가능해야 하며, 이는 필요에 따라 넓은 지역에 최대한의 파괴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과 특정한 목표물을 최소의 피해로써 완전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무기체계는 목표하는 작전환경과 임무에 적합하고 신뢰성이 있으며, 또한 전장에서 생존하여 적재무장(積載武裝)을 목표지역까지 운반, 정확히 투하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해야 한다.
즉, 공군력은 적 후방 깊숙이 침투하여 적의 심장부를 강타할 수 있는 전력이므로, 무기체계는 적의 적극 방공체제를 교란시킬 수 있는 전자전(電子戰) 능력과 그들의 적극 방어능력을 회피하여 침투, 공격할 수 있는 장비성능과 전투요원의 전술전기(戰術戰技)의 구비를 필요로 한다.
또한 적의 적극방어 및 악천후에서도 정확하게 목표에 도달하고 그것을 탐색, 공격하기 위한 항법(航法) 및 공격 장비의 고성능화를 필요로 한다. 더불어 공군무기체계는 고도의 정밀 고가장비인 동시에 첨단화가 빠르므로 무기체계 획득에는 중·장기적으로 검토 분석하여 신중하게 선정해야 하며, 경제성과 효율성은 무기체계의 연구개발 및 획득의 기준이 된다.
③ 시설:공군은 전투체계를 지원하기 위해 알맞게 설계되고 조작된 시설을 필요로 한다. 공군 시설은 전시·평시에 효과적으로 지원 기능을 발휘하고 생존성을 증대시키며, 부대의 재구성이 필요할 때 그 요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시설된다.
④ 부대 구조:공군에 부과된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대 구조를 끊임없이 개편하고 있다. 부대 구조에서 지휘 구조는 임무 분야에 따라 수직으로 구성되며, 기능 구조는 다양한 지휘계층(指揮階層)에 따라 수평으로 구성, 그 기능 분야에 따라 기획관리·인사·교육·정보·전투작전·군수·감찰·통신·시설·정훈·헌병·행정·항공의무(航空醫務)·법무(法務)·군종(軍宗)·연구개발 등으로 구분된다.
⑤ 편성원칙:한국공군은 전시·평시 동일조직으로 편성함을 원칙으로 하고, 지휘의 단일화와 지휘의 폭, 동질적 배속, 권한 위임, 의사결정 등의 원칙을 적용한다. 이러한 원칙으로 1999년 현재 공군의 전력편성은 정책수립 및 지휘기구인 공군본부, 집행 통제부대인 3개의 사령부 및 직할부대, 그리고 주임무 부대인 전술비행단 및 군수·교육·행정·의무 등의 지원부대로 편성된다.
공군본부에는 전 공군부대를 지휘, 감독하는 참모총장과 참모총장을 보좌하는 일반 참모와 특별 참모로 구성되어 있다.
3개의 사령부에는 공군작전을 모두 통제하는 공군작전사령부와 공군의 군수 지원 및 종합 군수관리와 창정비 업무를 총괄하는 공군 군수사령부, 공군의 비행교육, 군사 특기 및 기술교육, 장교·하사관·병이 될 자와 예비역 장병, 학군 사관후보생에 대한 군사교육, 훈련 및 장병모집 등을 관장하는 교육사령부가 있다.
단급부대는 전투비행단과 훈련비행단을 비롯하여 기능 중심의 공군 전술 기본단위부대 등이 있다. 전대급 단위부대로 구성된 몇 개의 임무 부서가 있으며, 전대급 부서 밑에는 필요한 임무대대를 두고 있다.
(1) 초기 항공작전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육군은 즉시 토벌작전을 위한 전투부대를 편성하였는데, 이 작전에 비행부대도 참가하였다. 비행부대는 1948년 10월 20일 출동명령을 받고 조종사와 정비사 각 10명이 L―4기 10대에 분승, 광주비행장에 착륙하여 같은 해 10월 22일부터 10월 31일까지 지원작전을 하였다.
이 작전은 긴급연락·정찰·지휘관수송·폭탄투하 등의 임무를 수행했는데, 항공기와 지상군 간의 통신방법이 전혀 없어 통신통(通信筒)에 연락문서를 넣어 공중투하하는 방법을 이용하였으므로 어려움이 많았다. 작전중 조종사 후방석에 정비사를 태우고 정비사의 손으로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공중투하했는데, 폭도를 살상하는 효과보다는 심리적 위협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 한 예로 반란군들이 양민을 학살하는 소위 인민재판을 공중에서 정찰하고 초저공으로 재판장 근처에 수류탄을 투하하면서 위협하자, 혼란이 일어나게 되어 많은 양민들이 위기를 모면하였다.
1949년 1월 24일부터 4월 14일까지 제주도사건에는 L―5기 6대가 출동, 양날개에 2.36인치 로켓 2문을 장착, 지상군을 지원했는데, 정찰·전단살포·지휘관수송 등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포탄과 소총탄 탄약을 뽑아서 만든 사제폭탄을 목측(目測)으로 투하하였다.
1949년 2월 12일 지리산지구 및 태백산지구에 준동하는 공비소탕작전에 출동했고, 5월 26일 옹진지구의 충돌사건에도 출동하여 정찰·전단살포·지휘관수송, 부상병과 약품수송 등 지상작전을 지원하였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공군 보유항공기는 22대를 가동할 수 있었을 뿐 전투기는 한 대도 없었다. 공산군의 전투기가 난무하는 가운데 한국공군은 AT6 및 L형 항공기로 공산군의 상공에서 맨손으로 폭탄을 던지면서 후퇴하는 지상군을 지원하였다.
7월 2일 미군에게서 F51 전투폭격기(일명 무스탕) 10대를 이양받아 그 다음 날부터 출격에 나서 남하하는 적전차 및 차량과 보급품 집적소 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첫 출격에서 비행단장 대령 이근석(李根錫)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크자 출격보다는 훈련에 중점을 두기로 하고 대구기지를 미 공군에게 이양한 다음, 진해기지로 이동하여 진해기지와 김해기지를 사용하면서 훈련에 열중하였다.
한국 조종사들의 전투력이 향상되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적의 공격이 가열되자, 부득이 8월 15일부터 비행훈련을 중지하고 낙동강 방어선지역의 적 이동병력과 보급품집적소 등에 대한 127회의 출격작전을 감행하였다.
또한,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병참선을 차단당한 적군이 패주하자 공군비행단은 진해에서 대구, 대구에서 여의도, 여의도에서 평양 미림비행장으로 이동하면서 항공작전을 수행하였다.
1950년 10월 중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다시 후퇴하게 되자, 공군비행단은 미림에서 여의도, 여의도에서 대전, 대전에서 제주도, 제주도에서 사천 등지로 이동하면서 지상군에 대한 지원작전을 계속하였다.
한편, 대전기지 이동시 남아있던 중령 김신을 비롯한 일부 조종사와 정비사 등이 주축이 되어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 백구부대를 편성, 항공작전을 계속하였으며, 이는 뒷날 한국공군 단독출격작전을 수행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결과를 낳았다.
1951년 8월 1일, 사천기지주둔 공군비행단을 제1전투비행단으로, 정찰비행부대를 제2정찰비행전대로 개편, 조종사 연성훈련(鍊成訓鍊)에 주력하면서 지리산지구 공비토벌작전을 지원하였다.
같은 해 9월 28일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를 강릉기지로 전진시켜 10월 11일부터 역사적인 한국공군 단독출격으로 인제 동북방 ‘당장곡’ 공격을 필두로 인제·통천·연천·회양·고성·현리·원산·안변·신고산 등지의 도로·철도·보급물집적소·교량 등을 목표로 총 500여 회의 출격을 감행하였다.
단독 출격 작전을 개시한 이후 1952년 1월 15일 미 공군이 500여 회의 출격으로도 절단하지 못한 승호리철교(평양 동쪽 10㎞ 지점)를 단 14회의 출격으로 차단, 한국공군의 전투기량을 과시하였다. 같은 해 8월 29일 UN군의 항공압박작전(Air Pressure)의 일환으로 감행한 평양 대폭격에도 36회 출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한국공군은 적의 후방보급로 차단, 적 지상군공격 및 공군지원작전 등 8,267회 유효출격을 감행하였으며, 39명의 100회 이상 출격조종사를 배출하였다. 최초의 100회 출격기록자는 중령 김두만(金斗萬)이었으며, 최고 출격기록자는 대위 유치곤(兪致坤)으로 203회의 출격을 기록하였다.
6·25전쟁중 주요 작전기지는 강릉·사천·대구 등지였으며, 강릉은 한국공군이 단독출격작전을 수행했던 유일한 기지였다. 강릉기지에서 중동부전선 일대의 출격작전을 수행하던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는 F51 전폭기 39대를 포함하여 각종 항공기 70여 대를 보유하게 되자, 1953년 2월 15일 제10전투비행전대를 기간으로 제10전투비행단을 창설, 전방 출격작전을 전담하였다. 사천기지 주둔 제1전투비행단은 제1훈련비행단으로 개편하여 조종사 양성훈련에 주력하였다.
이와 같이, 전쟁중 한국공군은 출격작전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교육·훈련을 강화하여 조종사 양성에 힘썼으며, 모든 기구와 체제를 점차 발전시켜 휴전 당시 공군병력은 1만1461명(장교 1,382명, 준위 140명, 장교후보생 1,036명, 사병 8,903명)에 F51D 전폭기 79대를 주역으로 한 총 11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2) 전술공군
6·25전쟁 개전 초 며칠 동안을 제외하고는 UN공군에게 제공권을 완전히 빼앗겼던 북한공군은 휴전협정을 무시하고 공군력 증강에 주력하였으며, 이에 한국공군은 상대적인 공군력 확보를 위하여 공군현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1955년 4월 이후 한국공군은 C46수송기·F86세이버제트전투기·T33제트훈련기 등을 인수하였으며, 1956년 4월 제10전투비행단이 제트화를 완료하였고, 교체된 F51 전폭기와 C46 수송기를 주축으로 1955년 10월 15일 조종사들의 전투훈련을 담당하기 위하여 대구기지에서 제5혼성비행단을 창설하였다.
이보다 앞서 항로통신부대와 관제경보부대도 창설, 모든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1957년 중앙항로교통관제소(ARTCC)를 미공군에서 인수, 영공 내를 비행하는 모든 항공기의 항로관제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1958년부터는 레이다기지도 인수, 운영함으로써 영공 내를 비행하는 모든 비행체에 대하여 전술요격 관제경보 능력도 구비하게 되었다.
같은 해 8월 김포기지에서 한국공군에서는 두번째인 제11전투비행단을 창설하였고, 1960년 2월 F86D 전천후 요격기를 인수받았으며, 1961년 7월 작전사령부를 창설하여 모든 전술부대의 작전체제를 통합, 일원화하게 되었다.
1962년 5월 동양최대 규모의 항공창(航空廠)을 건설하여 각종 최신 항공기의 정비지원과 후방지원 임무를 담당하였다. 1965년 4월 F5 초음속제트 전투폭격기(Freedom fighter)를 인수하였고, 1969년 8월 신예 초음속 전천후 전투폭격기 F4D 팬텀기를 인수하였다.
한편, 이에 앞서 1966년 6월 대형수송기 C54 항공기를 미 공군에서 이양받아 한국∼베트남 간의 전술적인 공수업무를 담당하였으며, 1970년 9월 대간첩작전용 해상초계기 S2 항공기를 인수받아 운영하다가 1976년 1월 해군으로 이관시켰다.
교육과 훈련은 공군의 구성원에게 임무 수행상 요구되는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게 하고 사명감과 감투정신 및 협동심을 고취할 수 있게 만든다. 교육은 인간의 이해력을 계발시키는 전인적 과정으로서 사물에 대한 폭넓은 견해와 상상력 그리고 바람직한 인격형성을 추구한다. 교육을 통하여 습득한 지식은 복잡하고 불확실한 문제에 대하여 가능한 해결방안을 제시해 준다.
훈련은 조직체 운영을 전제로 한 직무 수행방법과 협조방법을 습득하는 과정으로서, 계속적인 반복과 숙달을 통하여 사고의 습성과 행동의 반응을 표준적인 방향으로 지향시켜 준다. 또한, 훈련은 특정한 군사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기술과 숙련을 제공하며, 그 목적이 교육보다는 높고 실제적인 것이 특징이다. 공군의 현행 교육훈련과정은 다음과 같다.
(1) 기본 군사훈련
민간인에서 군인으로 신분이 바뀌는 데 필요한 군인정신의 함양과 복무절차의 관숙(慣熟) 및 공군 일원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본 군사지식과 기본 전투기량을 부여하기 위한 훈련과정이다.
기본 군사훈련과정에서 특히 강조되는 점은 군인 복무규율의 충분한 이해와 숙지,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생존권을 좌우하는 국토방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는 긍지를 심어 주는 것이다.
(2) 기술훈련
공군의 각종 특기별 직무와 직책을 이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부여하기 위하여 단계별로 실시하는 훈련이다. 기초단계에서는 최초로 배당되는 직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제공하고, 고급단계에서는 기술수준의 향상과 상위의 보직으로 발전하는 데 필요한 직무수행 능력을 제공한다.
(3) 작전훈련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실시하는 훈련으로, 이 훈련의 핵심은 비행훈련이다. 비행훈련은 공군이 보유하고 있는 각종 항공기에 대한 신규 조종사를 양성하는 한편, 조종사의 전투기량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단계별로 실시된다.
초등·중등·고등 비행훈련에서는 조종사로서의 기본 지식과 비행능력을 습득시키며, 작전가능 비행훈련에서는 공중전투(작전) 수행능력을 숙달시키고, 전환비행훈련에서는 새로운 항공기에 관한 지식과 비행능력을 부여한다.
(4) 군사전문교육
전시·평시를 막론하고 군사전문가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통솔력이다. 따라서, 군사전문교육은 공군장교들이 유능한 지휘관 및 참모로서 발전하도록 계획, 추진되고 있다.
군사전문교육은 공군력을 어떻게 운용하는가 하는 지식을 향상시키며, 군사학을 중심으로 하여 전략 및 전술적 작전요소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민주사회에서의 군대의 업무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심어 준다.
(5) 학술교육
공군의 학술교육은 대부분 군사학교교육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공학·자연과학·사회과학·인문학 등의 전문적인 지식 탐구를 위하여 일부 요원에게는 국내외의 민간대학이나 기타 전문교육기관에서 위탁교육을 시킨다. 이러한 위탁교육을 통하여 민간과 군대사회 간의 접촉이 활발해지며, 구성원들에게 건전한 사고방식을 형성시키고 개인적인 창의력을 길러 주게 하고 있다.
(6) 정신전력교육
정신전력은 무력전과 사상전의 승패를 결정짓는 핵심으로서 군대생활에서 조직화된 투쟁이다. 즉, 장병으로 하여금 지휘관을 중심으로 굳게 단결하고 왕성한 사기와 필승의 신념으로 부여된 임무를 능동적으로 완수할 수 있게 하는 조직화된 의지력인 무형의 전력이다.
정신전력의 지도, 육성 방향은 민주주의 기본 질서에 따라 지휘 및 통솔을 위주로 지도·육성되는 민주형 이념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적에게서 정치·심리 등 사상전의 위협을 부단히 받고 있는 한국의 특수성 때문에 정신무장이 더욱 요청된다. 따라서, 광범위한 정신교육과 적절한 사상통제(思想統制)가 필요하다.
정신전력교육의 목표는 투철한 국가관과 민족관을 확립하고, 왕성한 호국정신과 사명감을 고취하여 필승의 신념을 배양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정신전력은 장병들의 신념·사기·단결 등을 바탕으로 형성되며, 이는 지휘 통솔을 비롯하여 다원적인 참모기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지도된다.
한편, 1950년 4월 공군 발전을 기록하고 장병에게 정신적 양식을 제공하기 위해 『공군』이라는 기관지가 발간되었다. 이 기관지의 창간호에는 기미 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오세창(吳世昌)이 제호를 써 주었고 ‘축 공군창간’과 ‘뇌굉구제 위진사해(雷轟九齊威振四海)’라는 휘호를 주어 장병을 격려하고, 창간의 뜻을 깊게 하였다.
이 기관지는 6·25전쟁 중에는 일시 중단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 1953년부터 『코메트』·『미사일』·『공군』이라는 명칭으로 변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고, 현재는 분기마다 정기적으로 발행되고 있다.
베트남 패망과 계속적인 북한의 공군력 증강에 대처하기 위해 1970년대 초부터 모든 국민들의 자주국방의식이 고조되면서, 1975년 12월 국민의 방위성금이 모아져 F4 팬텀기 5대를 구입했으며, 1982년 9월 항공기 개발에 착수하여 국산 헬리콥터 생산에 이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최신예 초음속제트전투기를 생산, 아시아에서 세 번째 항공기생산국이 되었다. 이를 실전에 배치, 자주국방의 신기원을 마련함과 동시에 항공선진국을 향한 디딤돌을 마련하였다.
근년에는 MIG23 전투기에 대항할 수 있는 F16 전천후제트전투기 ‘필승 보라매’호를 도입하였다. 또한, 기지 개발도 추진, 많은 작전기지와 비상활주로를 건설했으며, 새로운 작전부대를 창설, 개편하는 등 체제 정비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1985년 12월에는 공군사관학교가 서울 대방동에서 충북 청원군 남일면 신캠퍼스로 이전하였다. 1988년 11월에는 공군교육사령부가 새 기지로 이전하였다. 이듬해 11월에는 C130 수송기를 도입하였으며, 새 장비의 개발로 한때 위력을 떨쳤던 F86F는 1990년에 마침내 전투기 명예퇴역식과 함께 사라졌다.
한편 1994년 공사 제46기 입교식에 최초로 태국인 나타차이가 생도로 입교하여 국방 선진의 자부심을 과시하였고, 이 해 5월에는 전천후 신형수송기 CN235M기가 도입되어 전력이 증강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KF16 국산출고기가 나와 전력자주화에도 크게 박차를 가하고 있다.
1990년대 초 공군은 국가방위의 핵심전력으로서 완벽한 영공방위태세를 확립하기 위해 방공포사령부를 창설, HH47 및 T59 항공기 도입 등을 이루었다. 특히 세계평화를 위해 걸프전쟁에 참가하여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전쟁승리에 기여했으며, 유엔평화유지군 지원 및 대전엑스포 행사 지원 등 대한민국의 위상을 국제사회에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국내항공기술의 발달은 한국형 KF16 전투기를 생산하게 되기까지 이르렀고, KF16의 실전배치로 인하여 공군력은 전쟁을 억제하는 역할과 국내 항공산업을 선도하는 역할까지 동시에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공군은 수송기·훈련기·헬기·대공무기체계 등 첨단무기체계를 운용하는 과학기술군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21세기 미래의 공군은 정보전쟁·우주전쟁·미사일전쟁·로봇전쟁, 그리고 지식·정보 네트워크의 개발 및 비약적인 발전과 통합 입체전 양상의 전쟁이 출현할 4차원전쟁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1990년 말 현재 한반도 주변 항공력 건설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 및 중국은 F2, SU30 등과 같은 고성능 전투기를 자체 개발중이거나 자체 생산하여 시험 비행중에 있으며, 조기경보, 통제기와 공중급유기 및 정찰위성 보유를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도 한·러 국경 200NM 이내에 20개의 비행기지를 운영하고 있으며, 차세대 신형폭격기와 전투기 개발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또한 아·태지역 국가들도 각국의 작전지역 확대를 위해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한반도 주변 항공력 건설 현황과 미래전에 대비하기 위해 미래전에 필요한 공군전력과 21세기 공군력 건설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공군은 미래지향적으로 공군력을 건설하기 위해 한국형 전투기를 생산하고 있고, 최신예 전투비행단 건설, 중형 수송기 도입, 방공무기체계 도입 등, 자국 공중 위협과 전략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전략형 공군력 건설’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21세기 안보환경에 대비하고 현존하는 적국의 군사력 위협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 신장된 작전영역에 대비하기 위한 전략형 공군력의 전력구조는 정보수집체계와 조기경보·통제체제를 갖추고 첨단무기를 운용할 수 있는 고성능 전투기 및 지원전력을 동시에 구비함으로써 자주적 억제와 작전수행 능력을 구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