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왕실이나 관리 등 상류사회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는 민간에까지 파급되어 뒷날 우리 풍속에 영향을 주었다.
변발(辮髮)과 호복(胡服)은 당시에 유행했던 몽고풍속의 대표적인 것으로, 원종 때 원나라에 가 있던 세자 심(諶 : 뒤의 충렬왕)이 처음 받아들인 후 왕실이나 관리들 사이에서 일상화되었다. 그리고 왕비들은 고고(姑姑)라고 하는 몽고식 모자를 썼고, 몽고식 연회인 보르차연(孛兒扎宴)을 베풀어 수천필의 포(布)로 만든 꽃과 기타 여러 가지 물건으로 장식하고 춤과 노래로 즐기곤 하였다.
또한 세비르(設比兒)라 하여 아기가 태어났을 때 이를 축하하러 들어가는 사람의 옷을 벗기는 풍습도 있었다. 몽고어의 영향도 적지 않아서 국왕이나 관리들은 몽고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홀치(忽赤) · 속고치(束古赤) · 조라치(照刺赤) · 아막(阿幕) 등 관제에도 몽고식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공민왕 때는 반원정책의 일환으로 변발 · 호복 등이 금지되었다. 이와 함께 다른 몽고풍속들도 금지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일부는 민간에 널리 전파되어 그 뒤에도 오랫동안 남게 되었다. 예를 들면, 여자의 예장(禮裝)에 쓰는 족두리나, 신부가 귀고리를 걸고 뺨에 연지를 찍는 것, 신부가 두식(頭飾)으로 쓰는 산호주(珊瑚珠) 꾸러미의 도투락댕기, 남녀의 옷고름에 차는 장도(粧刀), 여자들이 머리를 땋을 때 넣는 다리 등이 있다.
이 밖에 장사치 등과 같이 어미에 ‘아치’ 또는 ‘치’가 붙는 말이나 임금의 진짓상을 수라(水刺)라 하는 것은 몽고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고기삶은 공탕(空湯)을 ‘설넝’이라 하는 것도 몽고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고려 후기에는 고려의 풍속이 원나라로 흘러 들어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이를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