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이(月伊)·월내(月乃)·월자(月子)라고도 하며 방언으로는 다래 또는 달비라고도 한다.
신라 문무왕 2년(662)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에게 하사한 여러 품목 가운데 다리[頭髮] 30냥(兩)의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세조 2년(1456) 중국 사신에게 내린 왕의 하사물에 세발장체(細髮長髢)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다리는 조선의 특산품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연산군과 인조·영조 때의 기록으로 궁중의 가례(家禮)와 길례(吉禮)에 다리를 이용한 풍성한 머리가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리는 조선 중기 이후 매우 유행하여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되어 영조 때 여러 차례 부녀 체계(婦女髢髻)에 대한 사치금지령이 발표되었다. 이 때 상인(常人)과 천인(賤人)들은 체계를 허용했지만 사족(士族) 부녀자들은 가체를 금지했으며, 영조 34년(1758) 체계금지를 내리면서 다리 대신 궁에서 사용되는 쪽머리[郎子]와 족두리를 사용하였고, 이 제도 또한 족두리 장식에 대한 사치 논의를 거쳐 정조 12년(1788) 가체신금절목(加髢申禁節目)이 반포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다리로 머리를 장식하는 것이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이고 이는 몽고의 제도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고분벽화의 귀부인 모습에서 다리를 이용한 머리 장식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다리 상품(上品)이 7∼8만 냥까지 소비되어 중인(中人)의 집 10채에 해당되는 가치였다. 그후 다리의 크기와 사용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1910∼1930년대까지도 시골에서 행사가 있을 때 노인들이 다리를 사용하여 머리를 치장한 모습을 찾을 수 있으며, 지방에 따라서는 혼수품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