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公主)는 중국 진 · 한나라 때 비롯된 말이라고 하나,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되었다. 제도적으로 공주라는 호칭은, 고려 문종 때의 관제에 따르면 대장공주(大長公主)와 함께 정1품이었다. 그 뒤 공양왕 때 도평의사사의 건의에 따라 왕의 딸을 공주라 불렀으나, 조선 초기까지도 제도가 미비해 왕녀, 궁주(宮主), 옹주(翁主) 등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불렸다.
1422년(세종 4)에 이르러 중국의 고제(古制)를 상고해 진나라, 원나라 등에서 칭했던 공주를 내직의 호(號)와 구별하였다. 1428년(세종 10) 내관 제도를 개정하기 전까지 혼용되었으나, 1440년(세종 22)에 종실녀의 관제를 정하면서 정궁인 왕비에게서 태어난 딸만을 공주로 칭하도록 규정하였다. 이 규정은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의 외명부 조에 제도화되었다. 이로써 조선에서는 왕의 정실이 낳은 딸을 ‘공주’라 하고, 후궁이 낳은 딸을 ‘옹주’라 하여 구별하였다. 공주는 품계를 초월한 무품(無品)으로서 외명부를 대표하는 존귀한 신분으로 규정되었다.
공주는 왕과 왕비의 딸인 만큼 그에 합당한 권한과 예우를 부여받았다. 왕의 딸은 대체로 하가(下嫁) 이전에 작호를 받아 공주 또는 옹주로 책봉되었다. 공주가 혼인을 하게 되면 모든 절차와 준비는 종부시(宗簿寺)와 예조에서 주관해 국법에 따라 예로써 치렀다. 즉, 『국조오례의』 「왕녀하가의(王女下嫁儀)」에 의거해 납채, 납폐, 명복내출(命服內出), 친영(親迎), 동뢰, 공주현구고(公主見舅姑), 공주현사당(公主見祠堂), 서조현(壻朝見) 등으로 진행되었다.
공주의 남편은 처음 종1품의 위(尉)인 광덕대부(廣德大夫) · 숭덕대부(崇德大夫)로 의빈(儀賓: 駙馬都尉)에 봉작되었으며, 그에 준한 녹봉을 받았다. 의빈이 죽은 뒤에도 공주는 계속 쌀 · 콩 · 보리를 봄과 가을에 받았다. 공주의 아들은 처음 종7품, 사위는 2등급 낮은 종8품의 품계를 받고, 그에 준한 대우를 받았다.
공주는 내명부 · 외명부와 함께 친잠례와 양로연 등 궁중의 잔치, 왕비의 시위, 혼인 및 초상 등 여러 행사에 참석하였다. 공주가 죽으면 국가에서는 왕녀의 상장 제도(喪葬制度)에 따라 염빈(斂殯) · 예장(禮葬) · 조묘(造墓)의 3도감(都監)을 설치하고 3일간 조회를 열지 않으며, 왕 이하의 궁인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 등 정중한 예우를 표하였다. 의빈이 죽은 경우에도 조회를 열지 않고, 쌀, 콩, 종이, 정포, 염옷 등을 부의로 내리며 품계에 준한 예우를 하였다.
왕녀를 위한 공주의 호칭은 국왕과 지근(至近)한, 사적인 관계에 놓인 왕녀의 지위를 법적으로 보장해 주고, 대내외적으로 공인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