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의 기원을 문헌에서 보면 최고(最古)의 신으로 부여의 혁탑(革鞜), 마한의 초교(草鞒)·초리(草履)·혁교탑(革鞒鞜) 등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초혜로서 짚신이나 미투리·가죽신을 말하는 것이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어측(於則)이 초혜를 처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권42에는 망혜(芒鞋)의 기록이 있어 혜의 기원은 삼국시대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이 혜는 고구려의 황혁리(黃革履), 백제의 오혁리(烏革履), 신라의 금동리(金銅履)와 함께 이(履)의 범주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 국사(國師)의 오혁구리(烏革句履), 서인의 초리구리(初履句履) 또한 혜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신목이 없는 모든 신발은 ‘혜’라는 용어로 통일된다. ≪경국대전≫의 기록에 의하면 문무백관의 조복에는 1품에서 9품까지 흑피혜(黑皮鞋)를 신었다. 이로부터 조선 전기에는 관복에 흑피혜 일색이 되었다.
혜의 종류로는 흑피혜·분투혜(分套鞋)·투혜·피초혜(皮草鞋)·태사혜(太史鞋)·당혜(唐鞋)·운혜(雲鞋)·온혜(溫鞋)·발막신·징신[油鞋] 등이 있었다. 흑피혜는 백관의 조복·공복·제복에 사용된 신이고 분투혜와 투혜는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없으나 화자(靴子) 위에 겹쳐 신는 신으로 동반·서반 7품 이하와 상민에게는 금하였다.
피초혜는 가죽과 풀로 섞어 만든 마른신의 일종이다. 태사혜는 코와 뒤축에 태사문을 놓은 신으로 양반 노인과 사인(士人)의 마른신이다. 발막신은 남녀 노인의 마른신으로 코와 뒤축에 꿰맨 솔기가 없다. 징신은 생가죽을 기름에 절여 만든 신으로 비오는 날 신었던 신이다. 당혜와 운혜는 여자의 마른신이다.
초(草)·마제(麻製)의 신으로는 초혜·고혜(藁鞋)·마혜가 있고, 포백(布帛)으로 만든 신으로는 당혜·운혜·태사혜를 들 수 있다. 놋신[鍮鞋]은 놋쇠로 만들며 비오는 날 신는다. 지혜(紙鞋)는 종이로 만들며 숙종 때에는 마혜와 함께 대유행을 일으켰다. 나막신은 나무로 만든 신으로 일명 격지라고도 부르는데 비오는 날 신는다.
이와 같이, 혜는 조선시대 최고로 발달되었던 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신으로서 존비등위를 구별하였는데, 금제를 보면 1426년(세종 8)·1470년(성종 1)에는 투혜·피혜·초혜를 금지하였고, 1446·1449년에는 피초혜, 1519년(중종 14)에는 피혜, 정종 때에는 혜의 금지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