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에 새깃을 꽂아 장식하는 것은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에게 있었던 풍속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농경문 청동기(農耕文 靑銅器)에, 모자의 형태는 명확하지 않으나 새의 깃털과 같이 긴 것을 머리에 꽂고 밭갈이를 하는 인물이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에 이미 새깃으로 장식하는 습속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우관(鳥羽冠)의 모습을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삼국시대부터인데, 고구려에서는 『위서(魏書)』, 『주서(周書)』, 『북사(北史)』, 『당서(唐書』) 등의 기록에 의하면 절풍(折風), 소골(蘇骨), 나관(羅冠) 등의 모자에, 새의 깃털인 조우를 꽂아 장식하였고, 조우 장식의 유무를 통해 귀천의 차이를 드러냈다고 한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확인되는 조우관은 대부분 절풍에 천연의 조우를 장식한 모습이고, 감신총 벽화에 나타난 인물의 차림에서는 조우 장식의 투구도 확인된다. 그리고 여러 문헌 기록에서는 2개의 조우 장식을 언급하였지만 고분벽화에서는 다수의 깃털이 장식된 조우관을 볼 수 있고, 3개의 조우로 이루어진 장식 유물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모자에 장식한 새깃은 천연의 자연 조우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귀금속을 사용한, 화려한 조우 장식도 이루어졌다. 이는 당나라의 장초금이 쓴 『한원(翰苑)』의 고려조에 기록된 금우(金羽)와, 금동제 조우 장식 유물 등에서 확인할 수 있고, 고분벽화에서는 개마총의 벽화에 있는 인물이 금속제 조우 장식의 조우관을 착용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특히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절풍형 모자와 함께 다양하면서도 매우 화려한 금속제의 조우 장식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형태는 조우라기보다는 조익(鳥翼) 즉 새의 날개 모양에 가까운 것이 다수이고 또 일부에서는 중심에서 가장자리로 갈수록 넓어져 나비의 날개 모양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신라에서 직접적으로 깃털을 묘사한 조우의 표현은 절풍형 모자의 장식보다는 오히려 의성 탑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이나 황남대총 남분 은관과 같은 대륜식입식관(帶輪式立飾冠), 즉 대관(帶冠)의 세움 장식(立飾)에서 확인된다.
백제 역시 조우관의 풍습이 있었는데, “조회나 제사 시 모자 양쪽에 날개를 가하는데 전쟁에는 하지 않는다[若朝拜祭祀 其冠兩廂加翅 戎事則不].”라는 『주서(周書)』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다만 전쟁이 아닌 조회나 제사 시의 조우관 착용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수렵 시에 절풍 혹은 갑옷과 함께 썼던 투구에 조우를 장식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나라마다 착용 상황이 서로 달랐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리고 절풍형 모자의 양쪽에 새의 날개 모양으로 부착되었던 장식은 ‘금화(金花)’, ‘은화(銀花)’와 같은 초화형 장식으로 변화하였다.
청동기시대부터 확인되는 조우관은 삼국시대에 우리나라 전역에서 착용되었다. 삼국에서 모자에 장식한 조우의 세부 형태와 착용 상황은 달랐지만 신라에서 출토된 다양한 금속제의 조우 장식 유물은 매우 화려하게 발전했던 조우관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 달리 5세기 『위서』에서 7세기 『당서』까지 중국 사서에 지속적으로 조우관 착용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중국인들에게 조우관은 고구려의 큰 특징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