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는 조선 후기 『시물명고』, 『물명유고』, 『언문지』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773년에 태어나 1837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학문은 천문·지리·의약·복서·종수·농정·풍수·충어·조류 등에 두루 통하였다. 그의 유저인 『문통』 100권이 초고로 전해 왔는데, 현재 44책 69권이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그 중에서 『물명유고』는 당시의 다양한 국어어휘 7,000여 물명이 해박하게 주석되어 있다. 실학자이며 정음학자인 정동유를 직접 사사하여 당대의 문자음운학에 일가견을 가지게 되었으며, 신경준과 함께 조선 후기의 대음운학자로 평가된다.
본관은 진주(晉州). 초명은 경(儆). 자는 계중(戒仲), 호는 서파(西陂) · 방편자(方便子) · 남악(南嶽). 아버지는 역산(曆算)과 율려(律呂)에 조예가 깊은 현감 유한규(柳漢奎)이며, 어머니는 통덕랑 이창식(李昌植)의 딸로 경사에 능통하여 『태교신기(胎敎新記)』를 저술한 전주이씨사주당(師朱堂)이다.
유희는 나면서부터 특출하여 13세에 이미 시부(詩賦)를 지으며 구장산법(九章算法)을 이해하고, 15세에 역리복서(易理卜筮)를 꿰뚫었으며, 18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11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다. 37세에 충청북도 단양으로 옮겨 농사를 짓다가 10년이 지난 48세에 고향인 경기도 용인으로 돌아왔으며, 이듬해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53세에 둘째 누나의 권유로 과거에 세 번 응시하여 생원시에, 57세에 황감제(黃柑製)에 3등 3석으로 입격하는 것으로 그쳤다. 일찍 경학에 잠심하여 성리학을 주로 하고,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본으로 삼아 경서의 주석에 전념하였다.
그의 유저로 방대한 『문통(文通)』 100권이 초고로 전해 왔는데, 진주유씨 문중의 기탁으로 44책 69권이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학문은 천문 · 지리 · 의약 · 복서 · 종수(種樹) · 농정(農政) · 풍수 · 충어(蟲魚) · 조류 등에 두루 통하였고, 특히 그 중에서 따로 전하는 『시물명고(詩物名考)』 · 『물명유고(物名類考)』(物名考) · 『언문지(諺文志)』는 국어학사적 사료로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찍이 실학자이며 정음학자인 정동유(鄭東愈)를 직접 사사하여 당대의 문자음운학에 일가견을 가지게 되었다.
30세 전후에 저술한 『언문지』의 원고를 분실하고, 20여년이 지난 1824년 52세에 다시 저술한 것이 지금에 전한다. 이 책은 된소리 표기의 병서, ㅸ ㅹ의 설정과 ㅿ ㆁ ㆆ의 설정, 아래아( · )의 음가를 ‘ㅏ, ㅡ’의 간음(間音)으로 본 것, 사이ㅅ 표기 등의 주장이 탁견이다. 신경준(申景濬)과 함께 조선 후기의 대음운학자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들의 문자음운학이란 주로 당시의 한자음을 이상적으로 표기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언문지』의 유씨교정 초성 · 중성 · 종성 41자모를 보면, 당시 쓰이지 않는 글자가 상당수 채택되었고, 종성에는 ㅅ이 폐기된 내용이었다. 즉, 그것은 당시 한자의 현실음을 교정함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표기되는 글자 수 1만250개는 사람이 발음할 수 있는 모든 소리로서 초성례 · 중성례 · 종성례 · 전자례의 4부로 구성되어 훨씬 체계적인 논술이다. 또한, 정음의 문자구조가 정교하고 표음문자로서 훌륭함을 정확히 설파하며, 정음에 대한 천대를 한탄한 것은 후대의 학자를 기대하는 뜻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의 『물명유고』는 당시의 다양한 국어어휘 7,000여 물명을 수집하여 해박하게 주석한 물보류(物譜類)로서, 그 주석에 쓰인 우리 어휘는 무려 1,600이 넘는다. 『물명유고』는 그 섬세한 기술과 희귀한 어휘 등으로 보아 가히 그의 대표적 저술로 손꼽을 수 있으며, 그를 어휘학자로 평가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