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선사문화
유적
지상에 드러나 있는 덮개돌 밑에 받침돌로 널돌이나 자연석을 고이거나, 주검을 안치한 매장 시설이 있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자 기념물.
이칭
이칭
지석묘, 석붕, 대석개묘, 돌멘, 괸바위, 괸돌바위, 고엔돌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무덤
건립 시기
청동기시대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전라북도 고창군 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고인돌은 지상에 드러나 있는 덮개돌 밑에 받침돌로 널돌이나 자연석을 고이거나, 주검을 안치한 매장 시설이 있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자 기념물이다. 고인돌은 거석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지역은 고인돌 밀집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 약 1천 년 동안 존속되었다. 2000년에 고창 죽림리 · 도산리와 화순 효산리 · 대신리, 강화 부근리 · 삼거리 · 오상리 고인돌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 거석문화 중심지로 공인되었다.

정의
지상에 드러나 있는 덮개돌 밑에 받침돌로 널돌이나 자연석을 고이거나, 주검을 안치한 매장 시설이 있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자 기념물.
분포와 입지

세계의 고인돌은 주로 유라시아 대륙을 에워싸고 있는 해양에 인접된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된 양상이다.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중국 랴오닝〔遼寜〕 지역과 일본 규슈〔九州〕 지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은 하나의 고인돌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한반도 전 지역에서 발견되며, 약 4만여 기가 분포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전체적인 고인돌의 분포는 중국 랴오닝 지역에서 전라남도 지역에 이르는 서해 연안 지역과 큰 강을 따라 집중분포된 양상이며, 동해 연안 지역에서는 드물게 발견된다. 중국 랴오닝성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와 발해만 연안 지역에, 북한 지역은 대동강과 재령강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남한 지역은 한강, 낙동강 등 강 유역과 충청남도 보령, 전북특별자치도 부안 등 서해안 지역, 전라남도 전 지역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

가장 조밀하게 분포된 곳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부터 전라남도 전역에 이르는 지역으로 약 2만 2천여 기 이상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주변 지역은 중국 랴오닝성 750여 기와 일본 규슈에 6백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입지는 주로 강가나 하천변의 평지, 구릉 정상부와 그 사면, 고갯마루, 산기슭 등이며, 모두 덮개돌을 구할 수 있는 곳과 멀지 않은 곳이다. 평지 입지는 주로 낮고 평평한 구릉이 있는 평지보다는 산지 지형의 강이나 하천변 퇴적 평지에 자리하며, 고인돌은 강이나 하천의 방향과 나란히 열을 이루며 무리 지어 있다.

구릉 입지는 산에서 뻗어 내린 구릉이 대부분이며, 고인돌은 구릉 방향으로 무리 지어 있다. 산기슭 입지는 주로 산 경사면에 평탄하게 형성된 대지상이며, 고인돌은 산줄기를 따라 열을 지어 있다. 고갯마루 입지는 사람들이 넘나드는 고갯길 정상부이며, 양 능선에 무리 지어 있다.

대부분의 고인돌은 수 기에서 수십 기에 이르기까지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밀집해서 분포하고 있는 양상이다. 하지만 구릉 정상부나 산기슭에서 단독으로 1기 또는 2기가 분포한 것도 많다. 이 고인돌들은 정제된 외형적 형태와 웅장한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무리를 이룬 무덤 고인돌과는 다른 모습이다.

구조와 형식

고인돌의 구조는 지상에 드러난 덮개돌과 이를 고이고 있는 받침돌, 그 주위에 무덤의 영역을 표시하는 묘역 시설, 그 아래에 주검을 묻는 무덤방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구조는 바둑판식 고인돌이며, 개석식 고인돌에는 받침돌이 없는 구조이다. 탁자식 고인돌은 덮개돌과 받침돌만 있는 단순한 구조이고, 대형 바둑판식 고인돌도 대부분 무덤방이 없이 받침돌만 있는 구조이다.

고인돌의 가장 큰 특징은 덮개돌이다. 받침돌과 무덤방 위에 놓인 덮개돌은 지상에 드러나 있다. 덮개돌의 평면 형태는 대부분 장방형과 타원형이며, 측면 형태는 판상형, 장타원형, 장방형, 구형 등 다양하다.

탁자식 고인돌의 덮개돌은 두께가 50㎝ 내외의 판상석(板狀石)이 주로 사용되며, 남쪽으로 올수록 덮개돌이 1m 내외로 두터워진다. 대형 바둑판식 덮개돌은 입방체나 구형에 가까우며 두께가 2~4m 정도로 거대화된다.

받침돌은 덮개돌을 웅장하게 보이게 하거나 무덤방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고임돌이나 굄돌이라고도 한다. 받침돌 형태에 따라 널돌인 탁자식과 자연석인 바둑판식 고인돌로 구분된다.

묘역 시설은 고인돌 주위를 구획하여 무덤의 영역을 표시하는 시설이다. 묘역 시설에는 가장자리를 2~5단을 쌓은 석축형(石築形), 가장자리를 구획한 후 그 안을 깬돌로 쌓은 적석형(積石形)과 널돌이나 납작한 돌로 깐 포석형(鋪石形), 주위를 도랑으로 구획한 주구형(周溝形), 이외에 연접형(連接形) 등 여러 형태가 있다. 묘역 시설은 남해안 지역 고인돌에서 가장 발달하여 다양한 묘역이 성행한다.

무덤방은 주검이 안치된 공간으로 장방형 형태이다. 탁자식 고인돌의 무덤방은 지상에 드러나 있고, 바둑판식과 개석식 고인돌 무덤방은 지하에 마련되어 있다.

무덤방 형태는 널돌로 조립한 돌널형, 깬돌이나 냇돌로 쌓은 돌덧널형, 지상에서 받침돌이 빈틈없이 고인 돌돌림형, 구덩이를 파고 나무널을 안치한 구덩형, 한쪽을 널돌로 세우고 깬돌로 쌓은 혼축형 등 사용된 돌에 따라 구분한다. 무덤방은 덮개돌 밑에 1개만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드물지만 쌍으로 된 것도 있고, 북한의 탁자식 고인돌에는 칸막이하여 3~4개로 나눈 사례도 있다.

고인돌의 외형적인 형식은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위석식 고인돌로 구분된다. 탁자식 고인돌은 지상에 다듬어진 판석 4매로 짜 맞춘 무덤방 위에 판상석 형태의 덮개돌을 얹어 마치 책상 모양이다. 제단처럼 생겼다 해서 사형(祠形), 주로 북쪽에 많아 북방식, 북한에서는 오덕형,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돌집)이라 한다.

탁자식 고인돌은 서해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올수록 분포 빈도가 희박해지면서 전라남도 지역까지 분포하고 있다. 중국의 랴오닝 지역과 북한 지역의 대형 탁자식 고인돌은 벽석 3매가 덮개돌을 직접 받치고 있으며, 한쪽 단벽은 개폐가 쉬운 구조이다. 남쪽의 탁자식 고인돌은 단벽이 훼손되어 장벽석 2매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바둑판식 고인돌은 지상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한 받침돌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올려놓은 형태로 마치 바둑판 모양이다. 바둑판처럼 생겨 기형(棋形), 기반식(碁盤式)으로, 받침돌이 있어 지석식(支石式), 남쪽에 밀집되어 남방식이라고도 한다. 바둑판식 고인돌은 주로 중부 이남 지역에 분포하며, 호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 고인돌은 지하에 무덤방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무덤방이 있는 고인돌은 덮개돌의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뚜껑돌 주변이나 묘역 위에 받침돌을 배치하고 수도 많아진다. 무덤방이 없는 바둑판식 고인돌은 단독으로 자리하며, 기본적으로 받침돌 4개가 고인 덮개돌은 거대하면서 웅장한 모습이다.

개석식 고인돌은 덮개돌이 지하에 있는 무덤방을 뚜껑처럼 직접 덮고 있는 형태이며, 무덤으로 축조된 가장 보편적인 형식이다. 받침돌이 없어 무지석식(無支石式), 뚜껑식, 북한에서 침촌형 · 묵방형으로, 중국에서 대석개묘로 불린다.

이 형태의 고인돌은 수 기에서 수십 기가 무리 지어 있으며, 대체로 줄지어 배치되어 있다. 북쪽 지역에 있는 개석식의 덮개돌은 두께가 얇으며, 남쪽으로 올수록 두꺼워진다. 이 형식의 고인돌에서 무덤방이나 묘역 시설이 다양하게 나타나며, 무덤방 안에서 껴묻거리가 출토된다.

위석식 고인돌은 덮개돌의 가장자리를 따라 지상에 여러 매의 판상석을 돌려놓은 형태이다. 이 형식은 제주도 지역 고인돌의 특징으로 제주식 · 돌돌림식이라고도 한다.

평면 형태는 방형과 타원형으로 덮개돌의 형태에 따라 달라진다. 받침돌은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진 방형이나 장방형 판상석 10매 내외이다. 남한 내륙에서는 강돌로 돌려진 것도 있고, 잘 다듬어진 깬돌을 받침돌로 돌린 것, 장대석을 빈틈없이 세워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것 등도 있다.

채석과 운반, 축조

고인돌 축조에서 가장 어려운 작업이 덮개돌의 채석과 운반이다. 채석과 운반은 덮개돌 측면에 파진 채석 구멍, 통나무 굄 흔적, 측면의 밧줄 홈 등과 진안 여의곡 유적에서 확인된 통나무를 레일처럼 깐 운반로 유적에서 짐작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작업은 덮개돌을 얻는 일이다. 덮개돌은 암반에서 분리된 바위를 이용하거나 암반의 틈에 쐐기나 지렛대를 이용해 어렵지 않게 떼어 낼 수 있다. 하지만 덮개돌 대부분은 암반에서 채석한 것들이다.

일반적 채석 방법은 일정한 크기로 홈을 판 후 마른 나무를 박고 그 위에 물을 부어 나무의 부피가 늘어나면서 석재가 분리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흔적은 고인돌 덮개돌 측면에 나타난 20㎝ 내외의 채석 구멍이 있으며, 이를 통해 덮개돌 채석을 추정할 수 있다.

고인돌의 운반은 크기에 따라 목도식, 지렛대식, 견인식 등 여러 방법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집트의 석상을 운반하는 부조상이나 1607년에 제작된 일본 슨푸성〔駿府城〕 축성도, 1796년 『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구판(駒板), 인도네시아 숨바(Sumba) 섬의 고인돌 축조 사례 등을 통해 운반하는 방법을 복원할 수 있다.

거석을 운반하는 도구는 모두 Y자 형태의 나무끌개가 사용되고 있다. 운반하는 장면은 바닥에 통나무 굴림목이 깔려 있고, 나무끌개에 가로로 걸친 통나무 위에 올려진 덮개돌이 밧줄로 결박되어 있으며, 나무끌개 앞쪽에 4개의 밧줄을 연결하여 사람들이 끄는 모습이다. 이외에도 굴림목을 옮기는 사람, 지렛대로 뒤에서 보조하는 사람, 밧줄을 관리하는 사람, 지휘 통제하는 사람, 구경꾼 등 다양한 업무 분장으로 매우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장면이다.

운반되어 온 덮개돌을 무덤방 위에 올리는 방법은 세 가지로 추정된다.

첫째, 통나무 활주로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무덤방 위까지 비스듬히 통나무를 이용해 레일처럼 설치해서 덮개돌을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인도네시아 숨바 섬에서 활용된 사례이다.

둘째, 끌어올리는 방법은 개석식 고인돌이나 받침돌이 낮은 바둑판식 고인돌에서 흙이나 잡석을 쌓고 끌어올리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무덤방 벽석과 밀려나 있는 받침돌, 덮개돌과 받침돌 사이에 압착된 흙으로 짐작할 수 있다.

셋째, 덮개돌을 들어올리는 방법은 통나무를 정(井)자 모양으로 중첩해 끼워 넣어서 들어 올린 후 무덤방 위로 끌어옮기는 방법이다. 탁자식이나 받침돌이 높은 바둑판식 고인돌 축조에 사용된 이 방법은 덮개돌 균형을 잡기 위한 쐐기돌, 받침돌 높이로 수평을 조정한 사례, 지상 무덤방 위에 정확히 올려진 덮개돌에서 추론이 가능하다.

껴묻거리〔副葬品〕

고인돌에는 껴묻거리가 없는 무덤방이 훨씬 많지만, 다양한 껴묻거리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고인돌 껴묻거리는 크게 무덤방 안에서 발견되는 부장용 유물과 주변에서 발견되는 의례용 유물로 구분된다.

부장용 유물들은 무기류 · 부장토기류 · 장신구류 등으로 대체로 완형으로 출토된다. 가장 대표적인 무기류는 간돌검과 간돌화살촉,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있으며, 전 지역에서 발견된다. 특히 간돌검은 홈자루식, 통자루식, 슴베식 등이 있으며, 시기적 차이와 지역에 따라 선호도가 있다.

가장 많이 공반되는 유물은 간돌검과 간돌화살촉이며, 간돌검 1점에 수 점의 간돌화살촉이 부장 위치를 달리해 함께 발견된다. 비파형동검은 여수반도를 중심으로 남해안 지역 고인돌에서 많이 발견되며, 슴베에 홈이 있는 형태로 중국 랴오닝성 지역의 청동검과 차이가 있다. 이외 청동기로는 청동창, 청동촉, 세형동검(細形銅劍) 등도 드물게나마 출토된다.

부장 토기는 단지형으로, 붉은간토기와 가지무늬토기가 있으며, 주로 무덤방 안에서 1점씩 부장되지만 무덤방 밖에 쌍으로 부장된 예도 있다. 붉은간토기는 남한 전 지역에서 발견되지만, 가지무늬토기는 남해안 지역의 고인돌과 돌널무덤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북한과 중국에서는 미송리식 토기와 깊은바리형토기가 부장되고 있다.

장신구는 천하석제 곱은옥과 벽옥제 대롱옥이 대표적이며, 이외 구슬옥이 있다. 곱은옥은 쌍으로 발견되며, 대롱옥과 구슬옥은 수 기에서 수 십기씩 발견된다. 또 돌칼, 가락바퀴, 그물추 등 구멍 뚫린 유물도 장신구로 무덤방에서 껴묻거리된 채 발견되기도 한다.

의례용 유물은 무덤방 축조 과정이나 묘역을 조성할 때 의식에 사용된 유물이다. 피장자를 애도하는 장송용과 고인돌 축조 등과 관련된 제의용이 있다. 의례용 유물은 주로 완형이라 하더라도 일부를 인위적으로 깨뜨린 파손품들이며, 대부분 의도적으로 파손된 생활용 유물들이다.

고인돌 주변에서 발견된 매납용 유물은 완형으로 발견된 경우가 많다. 무기류인 간돌검 조각과 간돌화살촉, 수확용인 돌칼과 돌낫, 공구류인 돌도끼, 돌자귀, 돌끌, 돌대팻날, 그 밖에 그물추, 가락바퀴, 숫돌, 갈판과 갈돌 등 다양한 석기들이다.

껴묻거리 풍습은 대체로 무기류 중 검과 토기는 1점씩 부장되는 양상이며, 촉과 옥은 다수가 묶음으로 부장되며, 유물 상호 간에 조합되어 묶음으로 부장되기도 한다. 껴묻거리 위치는 유물에 따라 일정한 경향성이 있다.

무기류인 간돌검과 비파형동검은 동일하게 주검의 좌우나 다리 부근에서 검끝이 다리 쪽을 향한다. 돌화살촉은 배 부근에서 흩어진 채 발견되기도 하지만, 무덤방 가장자리에 수 점씩 묶음으로 부장된다. 부장 토기는 머리맡과 다리, 가슴, 관외 등 매우 다양하다. 장신구인 곱은옥은 머리 부근에, 대롱옥은 머리 부근, 가슴 등에서 발견된다.

당시 가장 으뜸의 공예품인 껴묻거리는 피장자의 사회적 지위나 축조 집단의 위상을 반영한 것이며, 동일한 유물을 공유한 부장 풍습은 오랜 관습과 전통성이 반영된 것으로 집단 간의 친연성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축조 의례와 제의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는 다양한 제의가 성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무덤 축조 의례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고인돌 축조 과정에서 각 단계마다 의례와 관련된 유물이 발견되며, 의기용에서 실생활에 사용된 모든 유물이 포함된다.

주검을 안치할 때 넣어 준 부장용 유물과 의식에 사용한 후 매납한 유물은 완형이지만, 나머지 의례에 사용된 유물은 일부 훼손하거나 일부러 부러뜨린 것들이다. 유물의 출토 위치는 부장용 유물과는 달리 무덤방 묘광 바닥에서부터 벽석 축조나 뚜껑돌 사이, 묘역 시설 등으로 무덤방 축조 과정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유물들은 장송용, 제의용, 축조 의례용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장송용 유물은 간돌검을 두 조각이나 세 조각을 깨서 부장하거나 무덤방 벽석에 꽂혀진 간돌검, 뚜껑돌 사이에서 출토된 생활용 유물들이다. 비교적 완형에 가깝거나 복원되는 유물이다.

죽음에 따른 제사 향연과 관련된 제의용 유물은 제의에 관련된 유물을 일부러 깨서 주위에 뿌린 석기나 토기 조각이다. 고인돌 축조와 관련된 축조 의례용 유물은 대부분 피장자를 위한 제의 의식과 관련된 석기와 다량의 토기를 파기한 유물들이다. 이와 같이 의례용 유물을 의도적으로 파기해서 주위에 뿌린다거나, 토기 조각을 깨서 버린 흔적은 당시 장송 의례에서 유물의 파의식(破儀式)이 매우 성행하였음을 보여 준다.

고인돌과 관련되는 제의 자료는 바위그림, 대형 건물터, 원형 수혈 유구 등이 있다. 고인돌에 간돌검이 새겨진 바위그림은 여수 오림동, 밀양 살내, 영일 인비동, 포항 칠포리 등에서 볼 수 있다. 그중 여수 오림동 바위그림은 중심에 간돌검이 새겨져 있고, 그 하단 옆에 2인의 인물상이 이를 향해 기원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간돌검을 숭배하는 제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주거 공간과 무덤 공간 사이에 있는 사천 이금동 지상 건물터는 특수한 형태의 신전(神殿)으로 추정되고, 여수 월내동 대형 수혈 건물터는 고인돌과 관련된 배치로 보아 제의 시설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흥 한천, 진안 여의곡, 김해 율하리 등지에서 발견된 원형 수혈은 무덤방과는 전혀 다른 원형으로, 가운데에 공간이 있는 형태여서 입대목을 세웠던 흔적으로 생각된다. 무덤방과 거리를 두고 있는 주위의 공간은 고인돌 축조 집단에 의해 제의 행위가 이루어졌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장법과 기능

고인돌에서 사람뼈가 발견되더라도 일부만 남아 있거나 흔적만 있는 경우가 많지만,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기도 한다. 비교적 온전한 형태의 사람뼈는 제천 황석리와 달성 평촌리, 진주 남강댐 지역 등 충적 평지의 무덤이 대표적이다.

고인돌에서 발굴된 사람뼈로 본 주검의 매장 방법은 바로펴묻기와 굽혀묻기가 있고, 이외에 화장(火葬)도 있다. 바로펴묻기한 예는 제천 황석리 고인돌이, 굽혀묻기한 예는 달성 평촌리 돌널무덤이 비교적 온전한 사람뼈가 남아 있는 대표적 사례이다.

춘천 발산리와 나주 랑동 고인돌의 화장한 사례는 주검을 다른 곳에서 화장한 후에 유골만 가져다가 매장한 것이지만, 경기 광주 역동의 경우처럼 돌덧널무덤 안에서 화장한 사례도 있다. 또한, 무덤방 규모가 1m 미만의 소형도 많이 발견되기 때문에 화장이나 육탈 후 뼈만 모아서 묻는 두벌묻기도 성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뼈 출토 무덤방 크기로 보면 160㎝ 이상은 바로펴묻기가, 150㎝ 내외는 굽혀묻기가 가능한 규모이다. 특이한 사례로 남강댐 지역 돌널무덤에서는 어린아이뼈와 목이 없는 사람뼈도 확인되었으며, 이빨을 빼서 피장자 입에 넣은 복상발치(服喪拔齒) 흔적 등 다양한 풍습이 발견되었다.

중국 동북 지역과 북한의 탁자식 고인돌에서는 한 무덤방 안에서 여러 사람뼈가 출토되기도 하고, 무덤방 안에서 화장한 예도 있고, 특정 부위의 뼈만 추려 안치한 간골 풍습 등 매우 다양한 장법들이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장법은 바로펴묻기가 많지만, 굽혀묻기와 화장도 상당수 확인되고 있다. 성별은 남자가 월등히 많으나 여자도 확인되며, 나이는 30세 전후가 가장 많으나 60세 이상도 있고 10세 미만의 어린아이도 많아 당시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었다. 키는 170㎝ 이상도 있지만 주로 150㎝ 내외가 많다.

고인돌의 기능에 대해서 19세기 말부터 고분설과 제단설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무덤 고인돌과 기념 고인돌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일찍부터 고인돌은 널(棺) 형태의 장방형 무덤방에서 사람뼈와 껴묻거리가 발견되어 무덤으로 알려져 왔다. 또한, 대부분의 고인돌이 무리를 이루고 수 기씩 줄지어 있는 점에서 혈연 집단의 공동 무덤으로 보기도 한다. 기념 고인돌은 무덤 고인돌에 비해 덮개돌이 웅장한 규모이고 차별화된 형태이면서 1기씩만 단독으로 있는 입지적 우월성을 가진 고인돌이다. 한반도 중부 지역을 경계로 북쪽의 대형 탁자식 고인돌과 남쪽의 대형 바둑판식 고인돌이 이에 속한다.

탁자식 고인돌은 중국 랴오둥반도와 북한 지역에서 발견되는 대형 탁자식들이며, 대표적으로 중국의 석붕산, 북한 은율 관산리, 포천 금현리가 있다. 대형 바둑판식 고인돌은 무덤방이 없는 고인돌로 둥글거나 입방체형 덮개돌 밑에 4개의 받침돌만 있는 것으로 충청남도 보령에서 경상북도 경주로 연결되는 이남 지역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고인돌 중 평지보다 높은 구릉상이나 산기슭에 단독으로 자리한 제단 고인돌은 주변의 집단들의 공공의 기념물이며, 고인돌 무리에서 높은 쪽에 차별화된 규모와 형태를 가진 묘표석 고인돌은 혈연 집단의 기념물 성격을 가진 것이다. 이외에도 고인돌의 기능에 대해 농경사회의 기념물이나 교통로의 표지석 기능, 취락의 경계 기능, 가매장 시설의 기능 등 다양한 견해들도 있다.

연대와 기원 문제

우리나라 고인돌의 연대는 껴묻거리의 상대연대(相對年代)와 과학적인 측정 자료 등 절대연대(絕對年代)를 통해 알 수 있다. 고인돌의 껴묻거리는 모두 청동기시대에 속한 유물들이다.

청동기시대 유물 중 빠른 시기에 해당하는 홈자루식 간돌검이나 삼각만입돌화살촉과 턱진슴베식돌화살촉 등 껴묻거리는 청동기시대 전기의 표지적인 유물이다. 또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겹아가리구멍이나 골아가리무늬, 빗금무늬가 있는 토기도 전기의 대표적인 토기이다. 이러한 유물들로 보아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에서 가장 많이 부장되는 껴묻거리인 통자루식과 슴베식 간돌검이나 슴베식 간돌화살촉 등은 청동기시대 중기에 성행한 유물들이다. 또 의례용 유물로 출토되는 삼각형 돌칼이나 홈자귀 등 공구류도 중기를 대표하는 석기 유물이다. 고인돌 껴묻거리 출토 빈도로 보아도 청동기시대 중기에 와서 가장 활발하게 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원형점토띠토기나 흑색마연긴목단지 등도 드물게나마 껴묻거리나 매납 유물로 출토되고 있어 고인돌이 후기까지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에서 측정된 과학적 자료는 주로 목탄을 이용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이며 100건 이상이다. 방사성탄소연대 중 B.P.3000년부터 B.P.2200년 사이의 측정치가 90% 정도이다.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측정치는 B.P.3000년에서 B.P.2800년 사이에 속하며, 보정연대로 서기전 1200년에서 서기전 900년 사이에 해당된다. 가장 밀집된 분포 곡선은 청동기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시기인 B.P.2700년에서 B.P.2300년 사이이며, 60% 이상이다. 보정연대로 서기전 800년 전후에서 서기전 400년 사이이다.

청동기시대 유물의 상대편년과 절대연대를 비교해 보았을 때 고인돌 축조 시기는 서기전 1200년대부터 서기전 200년 전후한 약 1000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청동기시대 전기에 축조되기 시작해서 중기에 가장 성행하였다가 후기에 쇠퇴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고인돌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없지만 크게 남방 기원설과 북방 기원설, 자체 발생설 등 세 가지 견해가 있다.

남방 기원설은 고인돌이 주로 해안과 가까운 지역에 분포하여 해양문화와 연관시킨 설이다. 농경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고인돌이 벼농사와 함께 남방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또 남방문화의 한 요소인 난생설화(卵生說話)의 분포와 고인돌의 분포가 일치하고 있는 점에서 남방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인돌이 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고 각 지역마다 독특한 형태들이 존재하고 있는 점에서 이 기원론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기도 한다.

북방 기원설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문화가 시베리아 지역 등 북방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북방문화 계통인 돌널무덤에서 고인돌이 발생했다는 설이다. 즉 돌널무덤이 지상화되면서 뚜껑돌이 덮개돌로, 무덤방이 지상의 받침돌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돌널무덤에서 발생한 개석식 고인돌이 거대해지면서 탁자식 고인돌로 발전했다는 설과, 가장 이른 형태로 나타난 탁자식 고인돌이 돌널무덤의 영향으로 개석식 고인돌이 발생했다는 견해가 있다.

자체 발생설은 고인돌이 한반도에서 발생했다는 자생설이다. 북방 기원설의 돌널무덤에서 개석식 고인돌이 발생했다는 설과도 연관된다. 하지만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대형 탁자식과 바둑판식 고인돌은 다른 지역에서 기원을 찾을 수 없다. 또한, 주변 지역의 고인돌보다는 축조 시기가 빠르거나 같다는 점에서도 다른 곳에서 전파되었다고 볼 수 없다. 무엇보다도 동북아시아에서 한반도는 고인돌의 밀집 분포지이고, 다양한 형태들이 존재하며, 복잡하고 거대한 구조와 껴묻거리 등에서 고인돌 문화가 가장 성행하고 발달된 곳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오강원, 『요동과 길림지역의 지석묘 문화와 사회』(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7)
이영문 · 윤호필 편, 『분묘와 의례』-청동기시대 고고학 4-(서경문화사, 2017)
『세계유산 고인돌』 -큰돌로 무덤을 만들다(국립광주박물관, 2016)
서국태, 『고대조선의 고인돌 무덤』(사회과학출판사, 2016)
하문식, 『고조선 사람들이 잠든 무덤』(주류성, 2016)
이영문, 『고인돌, 역사가 되다』(학연문화사, 2014)
유태용, 『한국 지석묘 연구』(주류성, 2003)
이영문, 『한국 지석묘사회 연구』(학연문화사, 2002)
하문식, 『고조선지역의 고인돌 연구』(백산자료원, 1999)
석광준, 『조선의 고인돌무덤 연구』(사회과학출판사, 1998)
김재원 · 윤무병, 『한국 지석묘 연구』(국립박물관, 1967)

논문

이재언, 「한반도 남부지역 청동기시대 부장풍습 연구」(『한국청동기학보』 19, 청동기학회, 2016)
이영문, 「청동기시대 소형 석실의 특징과 의미」(『문화사학』 44, 한국문화사학회, 2015)
이종철, 「청동기시대 입대목 제의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한국고고학보』 96, 한국고고학회, 2015)
안재호, 「묘역식 지석묘 출현과 사회상」(『호서고고학』 26, 호서고고학회, 2012)
이영문, 「호남지역 지석묘 형식과 구조에 대한 몇가지 문제」(『한국청동기학보』 8, 청동기학회, 2011)
배진성, 「분묘 축조 사회의 개시」(『한국고고학보』 80, 한국고고학회, 2011)
조진선, 「지석묘의 입지와 장축방향 선정에 대한 고찰」(『호남고고학보』 6, 호남고고학회, 1997)
이영문, 「호남지방 지석묘 출토유물에 대한 고찰」(『한국고고학보』 25, 한국고고학회, 1990)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