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유여(愉如). 호는 현동(玄同). 이광려(李匡呂)의 문인으로, 정제두(鄭齊斗)의 양명학(陽明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관직은 장악원정까지 지냈다.
그의 학문은 특히 언어학 분야에서 한글을 분석하여 우리 문자의 우수성을 입증하였는바, 1801년(순조 1) 제주도에 표착(漂着)한 5명의 이국인들의 언어와 문자를 한글과 한문으로 표기하여 그들과 통역이 가능하게 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주영편(晝永編)』 4권 2책을 저술하여 1806년에 간행하였다.
그의 학문은 제자 유희(柳僖)에게 계승되어 국문학상 큰 업적을 남겼다. 실학자였던 그는 일찍이 박지원(朴趾源)·김만중(金萬重)에 의하여 제창된 지동설을 지지하여 세상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그 밖에도 우리나라의 역사·문화·지리 등에 대하여 그의 독특한 실학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현동실유고(玄同室遺稿)』와 『주영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