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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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운해
훈민정음운해
언어·문자
인물
조선 후기에, 정언, 장령, 현감, 종부시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운해훈민정음』 등을 저술한 문신.
이칭
순민(舜民)
여암(旅菴)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12년(숙종 38)
사망 연도
1781년(정조 5)
본관
고령(高靈)
주요 관직
종부시정|제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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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정언, 장령, 현감, 종부시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운해훈민정음』 등을 저술한 문신.
개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菴). 아버지는 신숙주(申叔舟)의 아우 말주(末舟)의 10대손인 진사 내(淶)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로 의홍(儀鴻)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33세 때까지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며 살다가 33세부터 43세까지 고향에 묻혀 살면서 저술에 힘썼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운해훈민정음(韻解訓民正音)』(세칭 훈민정음운해)을 꼽을 수 있다.

43세 되던 1754년(영조 30) 비로소 향시에 합격했는데 당시의 시험관은 홍양호(洪良浩)였다. 그 해 여름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상경 후 홍양호와의 교분이 두터웠다. 과거합격 후 정언 · 장령 · 현감 등을 역임한 다음 1769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어 강화의 선원각(璿源閣)을 중수한 뒤 일단 고향에 돌아갔다.

그러나 곧 영조의 명으로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감수하고, 1770년에는 문학지사(文學之士) 8인과 함께 『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여지고 輿地考>를 담당하였으며, 이어서 그 해 6월 6일부터 8월 14일까지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의 감수를 맡았다.

이후 승지 · 북청부사 · 순천부사 · 제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낸 다음 1781년(정조 5) 70세로 일생을 마쳤다. 업적은 여러 문헌에 다음과 같은 논제(論題)나 책이름으로 나타나 있다.

『운해훈민정음』(행장에는 五聲韻解) · 『일본증운(日本證韻)』 · 『언서음해(諺書音解)』(유고목록과 서에는 東音解) · 『평측운호거(平仄韻互擧)』 · 『거제책(車制策)』 · 『병선책(兵船策)』 · 『수차도설(水車圖說)』 · 『논선거비어(論船車備禦)』 · 『의표도(儀表圖)』 · 『부앙도(頫仰圖)』 · 『소사문답(素沙問答)』 · 『직서(稷書)』 · 『장자변해(莊子辨解)』 · 『강계지(疆界志)』(또는 疆界考) · 『산수경(山水經)』 · 『도로고(道路考)』 · 『산수위(山水緯)』(旅菴全書에는 山水考로 통합되어 있음.) · 『사연고(四沿考)』 · 『가람고 伽藍考』 · 『군현지제(郡縣之制)』 등이다.

이상에서 그가 문자학(文字學) · 성운학(聲韻學) · 지리학(地理學) 등을 중심으로 다방면에 걸쳐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운해훈민정음』은 송학(宋學)의 시조의 한 사람이라는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성음도(皇極經世聲音圖)』(正聲正音圖라고도 함.)를 본보기로 하여 일종의 운도(韻圖)를 만들려고 전개한 이론인데,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깊이 문자론(文字論)을 전개한 학술적인 업적이었다.

참고문헌

「이조중기국어학사시론」(강신항, 『국어연구』, 국어연구회, 1958)
『운해훈민정음연구』(강신항, 한국연구원,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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