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柳僖:1773∼1837)는 조선 후기의 실학파에 속하는 유학자이며 음운학자로, 신숙주(申叔舟) · 최세진(崔世珍) · 박성원(朴性源) · 이광사(李匡師) · 이영익(李令翊) · 정동유(鄭東愈) 등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학설을 밝혔고, 국어에 관한 언급과 함께 한자음을 올바르게 표기하는 문제도 『언문지』 저술의 주요 관심사임을 보여주고 있다.
본서는 단행본으로 출판된 것이 아니고, 그의 문집 초고인 『문통(文通)』 권19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언문지』는 필사본과 신식활자본의 두 종류가 전하는데, 필사본은 이희승 박사가 금서룡(今西龍) 박사 소장본을 전사한 것을 다시 여러 사람이 베끼면서 사본이 유통되었고, 이 사본을 김구경(金九經)씨가 활자화한 것이다.
1937년에 조선어학회에서 『한글』(5권 1호, 5권 2호)의 부록으로 간행하였고, 이듬해에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1973년에는 대제각에서, 1974년에는 한양대 국학연구원에서 영인하여 간행하였다.
신식활자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교간유씨언문지(校刊柳氏諺文志)』라는 이름으로 소장되어 있다. 이것은 김구경이 활자본을 저본으로 중국에서 간행한 책으로 1958년 유창돈(劉昌惇)이 번역하여 『언문지주해(諺文志註解)』로 간행하였다.
유희는 박성원이 『화동정음통석운고(華東正音通釋韻考)』의 범례와 책 끝에서 언급한 ‘언문초중종삼성변(諺文初中終三聲辨)’ 등을 바탕으로 하여, 『언문지』 전반에 걸쳐 한자음을 제대로 표기할 수 있는 한글이 되도록 교정(校定)하기에 힘썼다.
그는 이러한 과정에서 표음문자로서의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한자음뿐만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다 적을 수 있도록 하여, 당시의 국어에 대한 예리한 관찰을 보여주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표음문자로서의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훈민정음 15초성’이라 하여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ㅋ, ㅌ, ㅍ, ㅈ, ㅊ, ㅎ, ㅸ’을 들었으며, 한글이 몽고 문자에서 유래했다고 언급하였는데, 이는 현대 연구와 상반되는 주장이다. 한글 창제에 대한 현대 학설에 따르면,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고유 문자로, 독자적인 발음 체계와 창제 원리를 가지고 있다.
순조시대의 조선한자음에서는 ‘雙쌍, 喫끽’ 두 한자만이 전탁음(全濁音)으로 발음된다고 하고 탁성(濁聲)의 표기에는 쌍형(雙形)이 정당하다고 하였다.
18세기의 구개음화현상(口蓋音化現象)에서는 당시 ‘댜뎌’를 ‘쟈져’와 같이 발음하나, 오직 관서(關西)사람들이 ‘天텬’과 ‘千쳔’을 달리 발음하고 있다고 하고, 유기음(有氣音)의 발생이 전청음(全淸音)과 ‘ㅎ’음의 결합으로 생긴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ㅇ과 ㆆ의 구별을 주장하였다.
모음자의 수를 ‘ㅏ, ㅑ, ㅘ, ㆇ, ㅓ, ㅕ, ㅝ, ㆊ, ㅗ, ㅛ, ㅜ, ㅠ, ㅡ, ㅣ, ㆍ’의 15글자로 교정하였고, ‘ㆍ’의 음가가 불명하여 ‘ㅏ’ 또는 ‘ㅡ’와 혼동되어 쓰인다고 한 다음 ‘ㅏ’와 ‘ㅡ’의 간음(間音)이라고 하였다.
전자례(全字例)에서 인간이 발음할 수 있는 성음(成音)의 총수, 즉 언문자 총수(한글로 기록될 수 있는 음)를 1만 250개라고 계산하였다.
『언문지』에는 당시 국어에 대한 유희의 증언이 상세히 담겨있어, 구개음화의 적용 시기나나 ‘ㆍ’의 변화 시기를 추정하는 데에 중요한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기존에 존재하던 우리나라의 운서에서 제시한 체계를 자세히 살핀 후 유희 자신이 세운 초 · 중 · 종성 체계를 제시하였고, 각자병서나 ‘ㅸ’, ‘ㅿ’과 같은 소실문자까지도 포함시켜 실제 소리값을 표기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음가 추정에도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