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는 자수·구수·평측 등에 제약이 없는 비교적 자유로운 형식의 한시체이다. 고시는 당나라 때 발생한 근체시와 구분하기 위하여 수나라 이전의 시 혹은 근체시 성립 이후 근체시 형식에 부합하지 않은 시를 가리킨다. 오언고시는 중국 후한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를 시초로 한다. 우리나라는 조선 초기 시선집인 『동문선』에서는 고시를 비중있게 다루었다. 그러나 최후의 한시선집인 『대동시선』에서 고시의 비중은 격감하였다. 이는 근체에 치중한 조선 시대의 습속을 나타낸다.
고시는 중국 당나라 때에 발생한 근체시(近體詩)와 구분하기 위하여 수나라 이전의 시체를 통칭하는 말로 쓰였다. 그리고 근체시 성립 이후의 근체시 형식에 부합하지 않은 시를 가리키기도 한다.
고시의 시체는 근체시에서와 같이 자수(字數)나 구수(句數)의 제한이 없다. 평측법(平仄法)도 없다. 다만 각운(脚韻)을 다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오언고시에는 둘째 구 끝에 운자(韻字)를 달기 시작하여 한 구씩 건너 운자를 단다. 칠언고시는 제1 · 2구 끝에 운자를 달고, 그 이하는 한 구씩 건너 운자를 단다. 근체시에는 통상 평성(平聲)의 운자를 단다. 그러나 고시에는 상성(上聲) · 거성(去聲) · 입성(入聲)의 글자로도 운을 단다.
환운 · 전운(換韻 · 轉韻)을 하기도 한다. 통운(通韻 : 비슷한 여러 종류의 운을 섞어 다는 것)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 편 가운데 동일한 글자를 몇 번이고 거듭 사용할 수도 있다. 오언고시는 중국 후한 말(後漢末)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를 시초로 한다.
삼조(三曹 : 조조(曹操) · 조비(曹丕) · 조식(曹植)의 부자형제) · 칠자(七子 : 공융(孔融) · 진림(陳琳) · 왕찬(王粲) · 서간(徐幹) · 완(阮) · 응창(應瑒) · 유정(劉楨))의 작품이 뛰어났다.
위진시대(魏晉時代)에는 완적(阮籍) · 혜강(嵇康) 등과 삼장(三張) · 이륙(二陸 : 육기(陸機) · 육운(陸運) 형제) · 양반(兩潘 : 반악(潘岳) · 반니(潘泥) 숙질) · 일좌(一左 : 좌사(左思)) 등이 뛰어났다.
그 뒤로는 사령운(謝靈運) · 도잠(陶潛) · 사조(謝朓) · 심약(沈約) 등이 활약하였다. 당나라 때에 이르러 위징(魏徵)의 「술회(述懷)」, 이백(李白)의 「고풍(古風)」, 두보(杜甫)의「북정(北征)」, 왕유(王維)의 「송별(送別)」 등이 걸작으로 꼽힌다.
우리나라의 오언고시는 신라 진덕여왕이 당나라 고종(高宗)에게 화친책의 일환으로 보낸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이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고구려 승려 정법사(定法師)의 「영고석(詠孤石)」이나 고구려의 장군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장(隋將) 우중문(于仲文)에게 전략적으로 지어 보냈다는 「우중문(于仲文)」도 오언고시이다.
을지문덕의 시는 『동문선』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시선집에서 오언절구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적으로 중국에서 근체시가 성립되기도 전에 오언절구를 우리나라에서 먼저 수용하였다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 평측법에 있어서도 근체시의 규격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시는 우리나라 오언고시로서는 초기의 작품이 될 것이다. 신라 말과 고려 초의 작품으로는 최치원(崔致遠)의 「강남녀(江南女)」, 김부식(金富軾)의 「결기궁(結綺宮)」, 최유청(崔惟淸)의 「잡흥(雜興)」 등이 모두 명편으로 꼽히는 것들이다. 칠언고시는 그 발달이 오언고시보다 뒤늦어 육조말기(六朝末期)에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조비(曺丕)의 「연행가(燕行歌)」, 육기(陸機)의 「백년가(百年歌)」, 심약의 「백저무가(白紵舞歌)」, 양무제(梁武帝)의 「동비백로가(東飛伯勞歌)」, 양간문제(梁簡文帝)의 「오야제(烏夜啼)」를 비롯하여, 초당사걸(初唐四傑)의 우두머리격인 왕발(王勃)의 「등왕각(滕王閣)」, 이백이 악부체(樂府體)를 취하여 지은 「오야제(烏夜啼)」 · 「양보음(梁甫吟)」 · 「촉도난(蜀道難)」 · 「장진주(將進酒)」등과 두보의 풍자적인 서정의 세계와 아울러 서사를 주로 하는 영물시적(詠物詩的)인 작품들이 뛰어난 것들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오언시보다는 칠언시가 늦게 나타나고 있다. 원효(元曉)가 지었다고 하는 “태어나지 말지라, 그 죽음이 괴롭도다. 죽지 말지라, 그 삶이 괴롭도다.(莫生兮其死也苦 莫死兮其生也苦).”(三國遺事 권4 蛇福不言)와 수로부인(首露夫人)의 설화에 나온 「해가(海歌)」 등에서 그 초기 모습을 볼 수 있다.
『전당시(全唐詩)』에 전하는 우리나라 한시의 대부분이 칠언고시이다. 칠언고시는 고려 초기부터 명작이 쏟아져 나왔다. 김극기(金克己)의 「취시가(醉時歌)」, 이규보(李奎報)의 「칠석우(七夕雨)」, 홍간(洪侃)의 「난부인(嬾婦引)」, 이숭인(李崇仁)의 「오호도(嗚呼島)」 등이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한말 황현(黃玹)의 「종어요(種菸謠)」도 대작으로 꼽힌다. 우리나라의 한시가 일반적으로 고조장편(古調長篇)에서 중국보다 뒤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시가 근체의 율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다. 이러한 현상은 시를 숭상하는 정도가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음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우리나라 초기의 시선집인 『동문선』과 『청구풍아(靑丘風雅)』, 그리고 조선 중기의 『국조시산(國朝詩刪)』에 있어서는 고체의 비중이 결코 가볍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숙종 때에 편찬된 『기아(箕雅)』에 있어서는 고시의 대부분이 기존 시선집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 싣고 있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의 고시작품은 거의 뽑아 싣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위항인(委巷人)의 시집인 『소대풍요(昭代風謠)』와 『풍요속선(風謠續選)』 · 『풍요삼선(風謠三選)』에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 고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 최후의 한시선집인 『대동시선(大東詩選)』에서도 고시의 비중은 격감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작품은 뚜렷이 감소되고 있다. 이는 근체에 치중한 조선시대의 습상(習尙)을 반사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고시는 그 형식의 자유로움 때문에 시수업의 초기단계에서 대개는 거치는 과정이다.
그리고 장편을 필요로 하는 서사시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편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 구사력이 함께 수반되어야 하므로 후세에도 걸출한 작품은 흔하게 나타나지 않았다.